[오피니언]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것 [공간]

전주국제영화제와 지프지기로서의 나
글 입력 2023.05.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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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는 올해 나를 포함한 약 450명의 자원봉사자, 지프지기와 함께했다. 지프지기로서 나는 발대식부터 10일간의 영화제, 그리고 해단식까지 거치며 영화제라는 거대한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을 받았다.

 

영화 <바빌론>의 매니가 끊임없이 열망했던 그 감각을 조금이나마 손에 쥐어본 것 같다. 이 기묘한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주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날아갔다가 돌아온 기분이다.

 

눈을 뜨면 게스트하우스의 옥상으로 올라가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아침을 먹어야 할 것 같고, 자기 전에는 침대 옆에 있는 블라인드를 내려야 할 것만 같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웠던 전주의 날씨마저 그리운 것 같은 하루하루, 서울로 돌아온 지금 나는 어딘가 쫓겨난 듯한 기분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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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FF知己


 

우리나라의 몇몇 영화제는 저마다 자원봉사자들을 부르는 이름이 하나씩 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비판 히어로즈, 디아스포라 영화제는 디아이즈와 같이 영화제의 특색에 맞추어 지어진 이름들을 구경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자원봉사자들은 ‘지프지기’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JIFF, Jeonju International Film Festival과 지기지우(知己之友)를 합한 단어로, 전주국제영화제를 잘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이다.

 

실제로 자원봉사자가 되면 사전 교육을 통해 일반 관객들보다 영화제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게 되니, 진실한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름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활동 내내 자신을 ‘지프지기’라고 소개하면서 정말 전주, 그리고 전주국제영화제와 친구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착착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진 못해도


 

처음 접하는 영화제 일에 많이 긴장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의 직무인 해외영화팀 해외게스트수행은 말 그대로 해외에서 초청된 영화제의 손님들을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GV, 호텔 등)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난생처음 만나는 영화계 관계자들, 그것도 심지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분들이 많았던 탓에 나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물론 국제영화제이니만큼 영어를 잘하시는 분들이 많았지만, 내가 그들의 모국어를 조금이라도 구사할 수 있었다면 조금 더 밝은 게스트들의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삐꺽거리며 게스트를 안내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자다가 이불을 차기도 한다. 그래도 상냥하게 웃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영화제의 중간중간 비가 왔는데, 내 우산을 쓰랴 게스트의 우산을 확인하랴 눈이 바빴다. 비가 오니 날씨가 추워져 ‘전주는 왜 이렇게 추운 거냐?’며 덜덜 떠는 게스트들을 보며 ‘그러게요…. 저도 너무 춥네요.’라고 말할 수 없어 하하 웃던 기억이 난다.

 

결국 들쭉날쭉한 일교차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감기가 심해 열이 조금 났던 날에는 멍하니 호텔 데스크에 앉아있기만 했는데, 무언갈 물어보러 온 게스트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다음에도 사는 곳과 다른 환경에서 일할 기회가 생긴다면 조금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건강 관리에 유의하여 활동하기로 굳게 다짐했다.

 

 

 

영화인들의 축제


 

아무리 예고편을 보아도 아리송해서 영 흥미가 안 생기던 영화도 그 감독을 짧게 수행하고 나면 무척이나 궁금해지곤 했다. 오랜 이동에 지친 얼굴에서 식지 않는 어떤 열기를 발견하면 자연스레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영화가 흥미로워지는 법이다. 아쉽게도 애매한 시간 탓에 많은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 너머의 제작자를 만난 이번 경험은 앞으로 내가 영화를 볼 때 큰 영향을 줄 것 같다.


영화제는 영화 제작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축제다.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과 영화제를 만드는 스태프들, 영화계 관계자들, 그리고 지프지기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일반 관객으로 방문했을 때는 실감 나지 않았던 사실을 지프지기로 활동하면서 눈에 새겼다.

 

호텔의 영화제 인포메이션 데스크에서 대기하며 오늘 본 영화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던 같은 팀 지프지기들, 영화의 거리를 걸으며 스쳐 지나갔던 다홍색 넥스트랩의 게스트들,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주쳤던 영화제의 관객들과 홀린 듯 잠시 걸음을 멈추고 걸었던 길거리 공연의 음악가들까지.

 

이 모든 사람이 모여 영화제라는 거대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사실 아직도 그 흥분이 식지 않은 것 같다.

 

 

 

다시 일상으로


 

그러나 이제 축제는 끝이 났고,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출발하여 30분 동안 느긋하게 걸으며 출근하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갈아타며 30분 만에 아르바이트에 도착해야 한다.

 

일이 끝나면 3분 거리의 영화관으로 향해 자리가 남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5분 거리의 열람실로 향해 미뤄둔 공부를 해야 한다. 아직도 머리는 축제의 흥분으로 가득한데, 냅다 일상이라는 얼음물이 끼얹어진 느낌이다.


그래도 적응해야지. 지루한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반짝이는 시간을 찾아내야지. 잔잔한 하루하루가 있기에 정신없는 축제가 재미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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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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