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전히 삭제되는 여성의 문장, 그 주체는? [문화 전반]

양자경의 아카데미 수상소감과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글 입력 2023.04.30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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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For all the little boys and girls who look like me watching tonight, this is a beacon of hope and possibilities. This is proof that ... dream big, and dreams do come true. And ladies, don’t let anybody tell you you are ever past your prime. Never give up."


2023년 3월, 미셸 여(양자경)가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시아계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이다. 미셸 여는 아시아계 아이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의 메시지를 전하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확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여성 여러분, 절대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게 두지 마세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미셸 여는 명확하게 여성들을 향한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SBS는 2023년 3월 13일 8시 뉴스에서 이 소감의 일부를 삭제했다. 바로 미셸 여가 'And ladies'라고 말한 부분을 편집해 도려낸 후 송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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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여파가 지나기도 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영화 의 배급사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는 4월 12일, 트위터에 해당 영화의 한국판 포스터를 내놓으며 원본 포스터에 적힌 메인 슬로건을 삭제했다. 'Barbie is everything' 그리고 'He is just Ken'이라는 두 개의 슬로건은 바비의 무한한 가능성과 능력을 강조하며 남자 캐릭터인 켄에는 상대적으로 무신경한 태도를 보여준다. 의도적으로 바비와 켄의 차이를 부각하여 웃음 포인트를 만들어 영화의 메시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 격인 바비 인형은 미국의 마텔 사에서 제조되어 왔다. 바비는 그간 특정한 백인 여성의 외모를 '완벽함'으로 규정하며 아이들에게 기형적인 외모 강박을 심어왔다. 마텔 사의 바비는 여성의 쓸모를 외적인 아름다움으로 한정해 왔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며 바비 인형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고, 마텔 사는 이후 여러 외모와 직업을 가진 바비들을 선보이고 있다.


영화는 이 흐름에 맞춰 획일화된 외모가 아닌 각기 다른 시원시원한 커리어를 가진 바비들을 소개한다. 대통령부터 변호사, 유명 작가, 노벨 평화상 수상자까지 바비들은 정말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러나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가 처음 공개한 공식 한국어 번역 포스터에서는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문장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메인 슬로건을 삭제한 공식 배급사는 한국뿐이었다.


SBS와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의 연이은 메시지 왜곡은 우연일까? 아주 우연히 두 주체 모두 원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여성이 부각되는 메시지를 삭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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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는 이 사안에 대해 '왜곡의 의도는 없었다'고 설명한다.

 

과연 의도가 없었을까. 송출한 한 문단의 수상소감 가운데 삭제된 문구는 'And ladies'라는 주어 뿐이었다. 백인과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미셸 여는 차별에 굴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기득권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00여 년 만에 마이크를 잡은 아시아계 여성의 목소리조차 빼앗는다. 여성이 여성을 응원하는 메시지까지 없는 일인양 잘라낼 만큼 기득권층은 여전히 견고하다.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의 변명 역시 SBS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는 게 그들의 공식 입장이다. 네티즌의 항의 이후 '여성 여러분'이라는 워딩을 살린 영상을 재공개한 SBS처럼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도 아래 두 문장을 덧붙인 포스터를 재공개하며 사안을 조용히 넘겼다.


"바비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여기는 그냥 켄"


여성의 성과를 축소·삭제하는 사회적 노력의 역사는 유구하다.

 

17세기 화가인 주디트 레이스테르는 여성이었으나 남성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들은 처음에 호평받았으나, 작가가 여성임이 밝혀지자 단번에 재평가되어 그 가치가 바닥을 쳤다. 마리아 빙켈만은 18세기에 혜성을 처음 발견했으나 남편의 이름으로 논문을 발표해야 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 역시 DNA 이중나선 구조 규명에 이바지했지만, 당시 그 공로는 남성에게 돌아갔다. 이외에도 각종 분야에서 지워진 여성의 이름이 얼마나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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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통해 인터뷰 등 모든 원본을 확인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언론의 뻔뻔한 메시지 왜곡이 난무한다. 두 회사는 자료를 정정했으나 처음의 보도 자료는 이미 누군가에게 수신되었다. 페미니즘 이슈나 기업의 이차적인 대응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영원히 미셸 여의 수상소감이나 바비 포스터에 여성을 향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다.


SBS와 워너 브라더스 코리아의 메시지 왜곡은 우연이 아니다. 꾸준히 지속된 여성 혐오의 문화가 근원이다. 이 문화가 공적인 상황에서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러한 '삭제'를 감행하는 개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개인의 자잘하고 수고스러운 혐오는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올바른 목소리도 커질 것이다. 논쟁이 길어질수록 미셸 여가 '왜' 그런 소감을 말했고 누군가가 '왜' 그 소감의 일부를 삭제했는지, 영화 의 슬로건은 '왜' 그것이며 그 문장은 '왜' 지워졌는지, 이 모든 선택에 의문을 가지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우리의 전성기는 아직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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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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