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구의 딸도 아닌 연수 [영화]

글 입력 2023.04.02 11:4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크기변환]포스터.jpeg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이 점점 두드러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뉴스 혹은 기사를 통해 흉흉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인류의 보편적인 편의를 위해 개발된 기술의 첨단이 누군가에 의해 악독한 의도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할 뿐이다.

 

2022년에 개봉한 김정은 감독의 <경아의 딸>은 전 애인에 의해 리벤지 포르노 유포의 피해자가 된 교사 '연수'와 그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로, 성범죄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그릇된 이데올로기가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고통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관객들로 하여금 깊은 고찰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크기변환]본문2.jpeg

 

 

최근 들어 인식이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네 사회는 아직까지 미성년자의 성생활과 관련해서는 한없이 보수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미성년자들의 성생활을 강제적으로 금지하거나 원천 차단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이와 같은 지나친 구속은 오히려 건강한 성생활과 성 관념의 왜곡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우리 모두 유념할 때가 되었을 법한데도 말이다.

 

<경아의 딸>은 학교 내에서 발견된 임신 테스트기를 보고 '계집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라는 말을 내뱉는 중년 남교사나, 남자친구와 관계를 맺으면 그것이 소문이 날까 봐 무섭다고 이야기하는 여학생과 같은 인물들을 극중에 등장시킴으로써 유독 여성과 미성년자에게 성적으로 엄격한 사회 분위기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크기변환]2aad1f6148046ba41bed7d78eb8db96170f07187.jpeg

 

 

한편, 영화의 주인공 '연수'는 교사로서 학생들의 연애에 나름의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등 기존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를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는 세대에 위치한 인물처럼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러한 포지션에 있는 연수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한 번의 좌절을 겪게 된다는 사실은 이야기가 가진 비극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성 관념의 생성을 지속적으로 저해하고 있는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그리고 그로부터 형성된 그릇된 거대 이데올로기가 어쩌면 기존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변화시킬 수도 있었던 자그마한 시도마저 억누르게 되었다는 사실은 영화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뒷맛이 개운치 않은 씁쓸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누구의 딸도 아닌 연수


 

[크기변환]본문3.jpeg

 

 

사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연수가 연수로서 존재하는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영화 속에서 연수는 언제나 연수라기보다는 경아의 딸이었으며, 젊은 여교사였고, 디지털 성범죄의 피해자였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연수의 삶이 연수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적 상황과 조건들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썩 유쾌한 인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가족과 친구를 비롯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이전처럼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기를 두려워하거나, 혹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보고 모욕적인 눈길을 던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연수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철저하게 외부적 프레임에 의해 구성된 연수의 일상이 연수가 마땅히 가져야 할 삶의 주체성을 옭아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크기변환]본문4.jpeg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연수가 주변인들과의 연대를 통하여 내면의 성장을 일궈내고 서서히 자신의 일상을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연수가 당당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영화의 결말부는 앞으로 연수가 경아의 딸도, 젊은 여교사도, 성범죄 피해자도 아닌 오로지 '연수'로서 떳떳이 살아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다소 요원하게만 느껴진다면, 일단은 먼저 우리 스스로라도 누구보다 당당하고 떳떳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의 딸도 아닌 연수가 앞으로 '연수'로서 당차게 살아갈 수 있기를 누구보다 열렬히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다.

 

 

 

에디터 태그.jpg

 

 

[김선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