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 읽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 — 현대 한국의 신검열주의 [문화 전반]

글 입력 2023.03.12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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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책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이후, 처음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시기가 다가왔을 때 나는 단지 활자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자아상을 잃어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무엇인가. 읽지 못하는 시간은 내게 반복해서 물어왔고 나는 답할 언어조차 잃었다. 

 

그러니 읽지 못하는 상태는 내게 활자를 읽지 못하는 것, 쓰지 못하는 것, 그러므로 말하지 못하는 것, 언어를 잃은 것,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 사회에 올곧게 서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종이책은 언제나 위기이고 출판업계는 항상 얼어붙은 겨울이다. 이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2021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년 동안 한 권 이상의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을 읽거나 들은 사람은 성인 10명 중 5명도 되지 않으며, 성인의 연간 독서량은 4.5권에 불과하다. 독서 문화가 자리 잡지 않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책 읽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에서 책 읽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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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2020, 세종서적)에서 “나태한, 연약한, 젠체한, 현학적인, 엘리티스트, 이런 것들은 골똘한 학자, 시력이 나쁜 독서가, 책벌레, 얼간이들 하면 연성되는 형용사들이다.”(p.427) 라고 말한다. 이 문장이 속한 장(章)의 이름은 ‘얼간이 같은 책벌레 이미지’이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활달하지 못한 자신을 걱정하는 할머니에 대해 말하는 망구엘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다. 

 

한국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란 나 또한 독서에 관한 양가적인 타인의 반응에 익숙하다. 청소년기 쉬는 시간이나 버스에서 책을 읽으면 나는 별나거나 똑똑한 척하는 ‘걔’가 되었고, 매번 ‘문학소녀네, 문학소녀’라는 비아냥거림인지 칭찬인지 모를 이야기를 들었다. ‘책 읽는’이라는 관형사구에 무슨 의미를 담든 그것은 발화자의 마음이었고 나는 그 말에 답하기 전에 그 수식 어구에서 발화자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곤 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좋아했겠네.’라는 언급에는 보다 더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책을 좋아하는 모습은 또래와 잘 지내지 못한다거나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졌고 이는 고쳐야 할 것 혹은 잘못된 것으로 여기어지기도 했다. 부모님은 누군가에게는 뿌듯해하며 아이가 스스로 책을 읽는 모습을 자랑하더라도,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인 독서에서 나를 끄집어내 다른 아이들 사이에 위치시키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선생님들 또한 학생의 본분인 공부에서 벗어나 취미의 독서를 즐기는 나를 보며, 읽던 책을 빼앗곤 벌점을 주거나 책을 집어 들어 제목이나 그 안의 본문을 큰 소리로 낭독하며 창피 주기를 즐겼다.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 자유 시간을 주었을 때, 나는 친구에게 빌린 로맨스 소설인 (당시에 막 인기가 상승하고 있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2》를 읽고 있었다. 선생님은 공부를 하거나, 떠드는 아이들은 그대로 둔 채 내게 다가와 내 책을 뺏어 들고는 ‘너는 이런 책을 읽니’라고 지적하며 ‘너는 저번 주에도 이 책을 읽더니 이 책만 읽니?’라고 핀잔을 주었다. 저번 주에 읽은 책은 1편이고 이건 2편이라는 답변을 원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잘못한 학생의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따금 고민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어떤 행동이 음악 선생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책’은 무슨 뜻이었을까? 그로부터 몇 주 뒤 학교 도서실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이 입고되어 불티나게 읽혔으니, 나는 아직도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더욱더 알 수가 없다.




읽어도 되는 책과 읽으면 안 되는 책



종이와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글 읽기는 소수의 기득권이 점유하는 권력이었다. 파피루스를 발명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파피루스를 생산하는 방식을 국가 기밀에 부쳤고, 파피루스는 양피지가 발명되기 이전까지 높은 값으로 거래되었다.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까지 책은 귀족들의 선물 등과 같은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인쇄술의 발달로 제작 속도가 증가하고 책의 가격이 내려가자 책은 전역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위해서는 글을 알아야 한다는 단계가 필요하다. 손쉽게 책을 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글자를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자만이 독서가가 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 흔하게 가질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특별함을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젠체함’과 ‘연약함’과는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해방’의 행위이다. 영국의 노예 소유자들은 노예들이 글자를 알게 되어 노예 해방 운동가들의 팸플릿을 읽게 되는 일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알게 되어 자신들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고 나서거나 노예들이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를 알게 되는 일을 막으려 했다. 그러니 당시 노예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다.’라는 사태의 묘사를 넘어, 자신의 생존에 결부된 최초의 행위가 되었다.

 

 

“대중은 문맹일 때 가장 다스리기 쉬운 집단으로 남는다. 책 읽기 기술의 경우 한번 익혔다 하면 절대로 원위치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차선책은 읽기의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2020, 세종서적, 406쪽

 


누가 읽어도 되는 책과 읽으면 안 되는 책을 구분하는가? 금서의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톨릭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리와 윤리에 반하는 책들을 모아 1559년에 금서 색인을 출간하였다. 괴벨스는 1933년 베를린에서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마르크스 등의 저작들을 불태우며 외설스러운 서적을 폐기하여야 새로운 정신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일장 연설을 펼쳤다. 

 

책의 검열행위는 기존의 질서를 파괴할 것으로 예상되는 책을 대상으로 출간과 판매 및 독서를 금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금서를 지정하는 것은 권력 주체이다. 이 주체는 국가, 종교, 혹은 권력을 지닌 한 개인 및 단체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시대에 유교 사상을 위협하는 도교나 천주교 서적 등을 금지하는 방식으로 책을 검열하였다. 놀랍지만 현재까지도 금서를 지정할 법적 근거가 존재한다. 국가보안법의 이적표현물이 그 근거이다. 이는 국가의 존속을 위협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하는 형법으로, 2022년 5월 헌법재판소에서 국가보안법 제7조의 위헌 여부 심리가 열렸다. 

 

국민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청구인 측의 주장에 법무부에서는 현재의 기준에 따르면 오남용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변론하였다. 이 법 조항을 근거로 군부독재 시절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저작들은 불온서적이 되었고, 1990년에는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조차 국가보안법 제7조 위반사항을 검토하기 위한 내사가 열렸다. 

 

1992년 대검은 “일반 독자들이 교양으로 읽는 경우에는 무관하지만, 학생이나 노동자들이 읽으면 불온서적 소지 및 탐독으로 의법 조치하겠다.”라는 어처구니없는 단서 조항을 붙인 채로 내사를 종결했다. 책이 담은 텍스트를 검열하는 일에서 더 나아가 ‘이런 책당신이 읽을 수 없습니다.’라는 독서하는 주체까지 검열하겠다는 사실을 국가기관에서 공표한 것이다.




이런 책을 읽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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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젊은작가 시리즈로 처음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현실적으로 포착했다는 지점에서 입소문을 타고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나 이 소설은 때아닌 논란에 휩싸였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남성을 역차별한다는 이야기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일부 남성들은 이 소설을 읽은 여성 연예인들의 SNS 계정에 도 넘은 욕설 댓글을 남기거나 사진을 태우거나 앨범을 자르는 등의 행위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는 더욱 과격해져 그들은 책상에  《82년생 김지영》이 꽂혀 있기만 해도 논란의 프레임을 씌운 채 욕설을 쏟아 내거나 사상검증이라는 때 아닌 구식 행위를 지속하였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라는 명제는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라는 사태를 설명하는 명제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띄는 행위가 되었다. 이 논란에서 중요한 지점은 해당 소설은 읽은 남성 연예인들에는 아무도 분노하지 않았고, 이 책이 좋거나 싫다는 언급과 관련 없이 구매 혹은 독서 행위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다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현재도 여전히 특정 집단에 의한 검열이 시행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특정 집단은 과거의 국가기관이 그랬던 것처럼 책이 담고 있는 텍스트에 이어 읽는 주체까지 검열한다. 그러니 이런 책을 읽을 수 없는 당신이런 책을 읽었다는 사실이 논란거리가 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신검열주의는 국가나 사회, 종교와 같은 거대 권력이 주체로 나서지 않는다. 신검열주의는 인터넷 커뮤니티, SNS와 같은 만인에게 공개된 개인적인 공간에서 권력주체가 생성되며, 이들은 자신들의 집단 안에서 참으로 통용되는 주장에 반하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들을 찾아내 검열한다. 이는 다른 주장을 담고 있는 짧은 인터넷상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출간 도서, 영화, 드라마, 웹툰 등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망라하여 벌어진다. 

 

이들의 주 활동 범위는 집단 형성이 가능할 정도의 폐쇄성과 타인의 주장을 쉽게 접하고 반응할 수 있는 개방성을 동시에 가진 네트워크 속이며, 검열은 개인 SNS 혹은 해당 창작물의 리뷰창에 단체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항상 네트워크 속에서 검열을 행하는 집단은 네트워크 밖의 권력주체와 유사하며 검열의 대상이 여성, 빈곤층, 노인, 아동, 성소수자, 장애인이라는 점에서 네트워크 속이라는 국지적 범위를 벗어난다. 

 

그렇기에 현대 한국사회에서 ‘이런 책’ 읽기는 소수자인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저항 행위이자, 혁명의 근본 단위이다. 그러므로 이런 책을 읽는 사람으로 자란다는 것은 끎임 없이 사회에 몸을 부딪치는 일이고, 그 충돌을 소화하는 일의 책임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굴레가 반복되는 행위다. 


왜 기득권은 금서를 지정하고, 누가 무엇을 읽는지 감시하는가? 이 질문의 해답은 아주 간단하다. 

왜 그들은 누가 무엇을 읽을까 두려워하는가, 왜 그들은 여성이 소설을 읽는 행위를 견디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흑인 노예들이 글을 배워 노예 해방 운동가의 팸플릿을 읽는 행위를 두려워하는가? 왜 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저작들을 읽는 행위를 무서워하는가? 왜 그들은 국민들이 책을 읽는 사람으로 자라는 것을 장려하지 않는가? 왜 그들은 현대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 자체를 막으려고 드는가?

 

인간이라면 도대체 그 책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이리도 눈을 부릅뜨는지가 더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화씨 451》의 정부처럼 아무리 책을 불태운대도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사상과 철학은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일평생 이어질 것이다. 물성을 지닌 책을 금지하거나 불태운다고 과거의 행위가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특정 집단에게 책을 금지하거나 불태우려는 사건이 존재했다’라는 주제로 쓰인 새로운 책이 발간되는 한이 있어도 그 사건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건이 담은 함의도, 그로부터 읽어낼 수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점도, 잘못도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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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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