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사람의 시선

<더 폴>과 <조조 래빗>의 어린이들
글 입력 2023.02.19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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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영화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 이랬다 저랬다의 평면적 감상 혹은 어떤 씬이 아쉬웠고 무슨 대사가 인상 깊었는지를 써두는 것으로 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물 같아서 어디 담기면 그런 모양대로, 어디가 새면 새는 대로 좋다. 내게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주연으로 세운 작품이 각별한데, 대표적으로 타셈 싱의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과 타이카 와이티티의 <조조 래빗>이 그런 작품군에 속한다. 공감하는 비판과 공감하지 못하는 비난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들이다. 손으로 막는다고 막아질 거였으면 사랑을 파도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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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의 오프닝 시퀀스 중 한 장면.

 


이제 막 영화라는 산업이 자라나기 시작한 1920년 미국 할리우드의 병원. 쇄골이 부러져 입원한 알렉산드리아(카틴카 언타루)는 우연히 하반신이 마비된 전문 스턴트맨 로이(리 페이스)를 만난다. 로이는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세상 끝에서 온 다섯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지만 여전히 자신의 절망을 억누를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겨우 여섯 살인 알렉산드리아가 그 절망을 알기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과 환상으로 범벅이 된 이야기는 로이의 정신적 상태에 따라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데 알렉산드리아는 그들의 이야기가 슬프게 끝나는 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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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래빗>의 오프닝 타이틀.

 

 

그리고 시간과 대륙을 지나 2차대전의 막바지를 치르고 있는 독일. 작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상상의 친구가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일 정도로 열렬한 나치다. 독일 소년단에 가입해 멋있게 유대인을 죽이고 히틀러의 개인 경호원이 되는 것이 꿈인데, 어느 날 어머니 로지(스칼렛 요한슨)가 집 안에 숨겨둔 유대인 엘사(토마신 맥켄지)를 마주친다. 유대인은 머리에 뿔이 있고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괴물인데도 조조의 배 속에서는 자꾸 나비가 난다.

 

두 작품 모두 초현실적인 영상이 두드러진다는 점은 반문할 필요가 없다. <더 폴>은 순수 로케이션 촬영만으로 살바도르 달리 풍의, <조조 래빗>은 웨스 앤더슨 풍의 미장센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영상미로만 영화가 기억되지 않는 것은 스토리에 서사를 부여하는 배우의 힘 덕분일 것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가 더해질 때,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하는 주인공이 어린이일 때 메세지는 묘하게 애틋해진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이 든다. 실존하지 않는 인물임을 알면서도 괜히 더 마음이 쓰인다. 밥은 어떻게 먹나. 잠은 잘 자나. 외롭거나 슬프지는 않나. 화난 사람들이 집을 태워서 아버지가 죽었다고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얼굴이나 거리에 매달린 어머니의 시체 앞에서 무릎을 안고 앉아 있는 조조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들이쉬는 숨이 무겁다. 이런 관객들을 둔 채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간다. 여전히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숨기지 않고 솔직하다. 솔직함에는 말할 솔직함과 말하지 않을 솔직함이 있는데 아이들은 둘 모두를 가지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에게 죽지 말라고 하고 조조는 엘사에게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숨긴다. 둘 다 상대가 떠나지 않고 곁에 남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비록 알렉산드리아는 로이의 부탁으로 모르핀을 몰래 가져오려다 자신이 죽을 뻔 했고 조조의 어머니 로지는 나치에 반대하며 유대인을 돕다 죽었지만 말이다. 포장되지 않은 가장 날것의 솔직함으로 로이는 살 수 있었고, 조조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솔직하지만 미운 마음을 또 다른 솔직함으로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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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래빗>의 한 장면.

 

 

그러나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상황을 끌어와야 하고, 그런 면에서 아이들은 굉장히 취약하다. 조조의 친구 요키는 총동원이라는 명령 하 11살의 나이에 종이 군복을 입고 참전한다. 다행히 요키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여전히 유대인이 최악의 괴물이라고 믿는 조조에게 사실 이제 유대인은 아무 상관 없다며, 히틀러는 죽었고 진짜 괴물은 영국군이라며 ‘어른스럽게’ 알려 준다. <조조 래빗>이 유쾌하지만 입 안이 깔깔한 풍자극인 이유는 이미 수많이 다루어진, 그러나 익숙해져서는 안 될 홀로코스트라는 사건을 세뇌된 독일 어린이의 시선으로 풀어낸다는 점에 있다. 조조와 요키, 독일 소년단으로 대표되는 나치 독일의 타자 혐오는 어느 세기에도 통하는 두려움이며 사실과 다른 주입된 정보만을 맹목적으로 믿고 완전한 적을 상정한 어린이들은 지금의 아이들은 어떤지, 그들을 그렇게 만든 지금의 어른들은 또 어떤지, 어떻게 해야 좋은 것인지 돌아보게끔 하기도 한다. 어린이와 그를 둘러싼 주변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결코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다. 관객의 웃음은 전쟁이 약자에게 더욱 가혹함을 알기 때문에 지을 수 있는, 양심의 가책 어린 쓴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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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폴>의 한 장면.

 


<더 폴>의 중반부, 알렉산드리아가 신부의 짐에서 훔쳐온 성체를 하나 나눠주자 로이는 “나를 구원해 주려는 거니?” 라고 묻는다. 성체의 개념을 모르는 알렉산드리아는 그게 먹을 것이어서 로이에게 준 것이지만 말이다. 나중에 알렉산드리아가 로이의 부탁을 오해해 로이의 자살 시도를 막은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눈물로 죽음의 그림자를 거둔 로이가 다시 웃으며 스턴트 장면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하면 꽤 두드러진 메타포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리아는 여전히 로이에게 자신이 무엇을 준 건지 모른다. 어린이가 주는 것은 어른에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만 아이는 아직 그것을 모른다. 물론 꽤 자주 그 반대일 때도 있다. 때묻은 자석 하나, 어디에서 주웠는지 모를 작은 돌 하나 같은 것은 그 아이에게 전부임에도 마음의 여유가 없는 어른은 그 전부를 주머니 속에 넣고 잊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을 잊었다는 걸 상기시켜 주는 건 또 다시 어린이다.

 

몇 번을 돌려봐 늘어진 필름 속에서 나이 들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가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떤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묻게 된다. 그리고 어떤 대답이 돌아오든 목이 막혀서 괜히 아이의 볼을 찌르고 작은 어깨를 감싸안고 싶어진다. 우리는 영화 속의 아이들을 보며 자라왔지만 이들은 자라지 않고 영원히 우리의 마음 한 구석 깊은 곳을 찌른다. 작은 사람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천진한 얼굴로 내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애틋할 수밖에 없다.

 

 

[김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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