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장애'를 극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 뮤지컬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

글 입력 2023.02.01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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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윅’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은 베토벤과 조카의 실화를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베토벤의 이름 ‘Ludwig’은 원래 독일식으로 ‘루트비히’라고 읽어야 하는데, ‘루드윅’은 극 중 베토벤의 조카 카를이 어른 시절 삼촌을 부르던 명칭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자신의 성찰하는 과정에서 카를과의 관계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만큼 후반부는 베토벤과 카를의 관계가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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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본 작품은 결코 이 둘 간의 관계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과 청년 시기를 마주하는 현시점의 베토벤, 마리와 베토벤의 이야기가 함께 극의 큰 골자를 이룬다. 베토벤, 마리, 카를 모두가 이 극의 주인공이며 모두 각기 다른 ‘장애’를 극복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장애는 신체 기관이 본래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를 대개 이야기하지만, 어떤 사물의 진행을 가로막아 거치적거리게 하거나 충분한 기능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의미한다. 본 뮤지컬은 청각장애 때문에 고통받았던 천재 작곡가 베토벤, 여자라는 성 때문에 건축가로서의 꿈을 이룰 수 없었던 마리, 원치 않았던 작곡가로서의 삶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카를의 이야기이다.

 

극은 수도원의 한 수녀가 그녀를 찾아온 피아니스트로부터 베토벤이 죽기 직전 남긴 편지를 받아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편지를 읽으며 그의 음악, 그와의 시간을 떠올리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베토벤의 전반적인 일생으로 연결된다. 무대 위에 등장한 현재의 베토벤은 과거 자신의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회상하며 각 시기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치유해 나간다. 유년 시절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끊임없이 모차르트가 되길 강요당했으며 이에 그는 폭력의 영향력 안에서 음악을 한다.

 

이후 작곡가로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갑작스럽게 청각장애가 찾아오며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마리와의 교감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가고, 이러한 과정을 회상하며 베토벤 또한 일평생 아팠던 자신의 결점을 조금이나마 해소한다. 이러한 과정이 하나의 음악에서 한 악장이 끝나면 다음 악장으로 넘어가듯, 유년기라는 1악장, 절망과 고통에 빠져있던 2악장, 이를 극복했으나 카를과의 관계에 집착했던 3악장, 자신의 지금까지 태도를 성찰하고 온전한 자신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4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베토벤과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서 자란 것으로 설정된 마리(가상 인물)는 그 당시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도 자신의 꿈을 꿨다고 말한다. 이때 베토벤은 당시 맞으면서 피아노를 쳤던 자신의 음악을 들으며 꾼 그녀의 꿈은 허황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지속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아노를 단 한 번도 진심이 아닌 것으로 대한 순간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항상 그의 꿈이었다.

 

이런 면에서 아무리 힘든 상황이더라도 이를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두 사람의 닮은 모습이 엿보인다. 폭우가 몰아치던 날 불쑥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발터를 데리고 베토벤을 찾아온 것이 마리와 그의 첫 만남이었다. 발터에게 음악을 가르쳐달라는 그녀와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고 나서 발터가 일련의 사고로 죽게 된 후 베토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아픔을 겪고도 꿋꿋하게 계속해서 앞을 향해 가겠다는 마리의 모습에 베토벤은 지금까지 절망에만 빠져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고 베토벤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 나가며 또다시 위대한 작곡가로서의 여정을 시작한다.

 

이후 마리는 건축가가 된다. 남자의 옷을 입고 나타난 마리를 베토벤은 알아보지 못하고, 이윽고 마리가 자신이라고 밝히자 그제서야 그녀를 알아본다. 그녀는 여자 옷에서 남자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인데, 지금까지 거절이었던 것이 수락으로 바뀌고, 부정이 긍정으로 바뀐다고 말한다. 건축은 남성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성을 숨긴 채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베토벤에게 장애는 청각 장애였지만, 마리에게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여자’라는 성이 장애였다. 두 인물은 ‘장애’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간다. 물론 그녀가 자신의 성을 밝힌 후 건축가로서 활동하지 못하게 되면서 수녀가 되어 여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게 되지만, 당시 사회적 배경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성이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할 방법은 수녀가 되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더불어, 어린 조카를 통해 발터에 대한 아픔과 죄책감을 덜어내고자 했던 베토벤은 어린 카를에게 혹독한 피아노 연습을 유도하며 자신을 이을 미래의 음악가로서 훈련시킨다. 하지만 카를은 계속해서 음악을 거부하고 이로 인해 베토벤과의 갈등이 고조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지 못하는 내성적이고 연약한 성품을 가진 인물인 만큼 그가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은 있지만 실제로 현실을 깨고 나갈 자신은 없다. 즉, 그의 ‘성격’이 장애로 작동하게 된다.

 

결국 카를은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이로써 베토벤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한다. 그가 카를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강요했던 것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행사하며 음악을 강요한 것도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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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베토벤, 마리, 카를은 모두 자신이 가진 장애와 직면하여 싸움으로써 이를 극복해 나가며 성장한다. 동시에 마리와 베토벤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본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마리는 자신은 ‘건축가’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서는 누군가가 꿈을 이루길 바라며 수학을 가르친다. 베토벤은 계속해서 자신을 이을 미래의 베토벤(음악가)을 양성하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이 죽고 나서도, 그리고 자신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 다음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베토벤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찾아왔다 그의 호통에 놀라 도망친 소심한 작곡가의 악보를 보면서 미래의 음악을 들으며 감탄한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나 베토벤이 등장할 때는 조명이 어두운 파란색을 주로 이루다가, 그들이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황금빛 노란색으로 바뀌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의 현실이 암울할지라도 그들의 후대에 미친 영향은 절대 적지 않음을 암암리에 보여준다. 실제로 베토벤은 후대에 브람스, 슈베르트, 슈만, 바그너 등 수많은 걸출한 추종자들을 양성했다.

 

이 작품에서 베토벤이 마지막에 접한 미래의 음악가는 프란츠 슈베르트로 그려진다. 그는 독일 낭만주의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인 만큼 독일 고전 음악 작곡가로서 고전주의 형식을 완성하고 낭만주의 등 새로운 음악사조가 탄생할 수 있는 산파가 되어준 음악가인 악성 베토벤과의 연결성 면에서 유기적인 동시에 두 음악가의 대조되는 음악 스타일을 대조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으로 슈베르트를 골랐다고 사려된다.

 

실제로 극 안에서 들려오는 베토벤의 음악은 전반적으로 역동적이고, 힘있고 무거운 반면, 마지막에 들리는 슈베르트의 음악은 서정적이며 따뜻하고 비교적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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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처음에는 액자처럼 보이고, 단순히 무대 위 공간을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조물도 한 발짝 떨어져 보면 건물의 골자로 보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건물의 골자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의 음악과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을 가졌던 마리가 지은 집을 연상시킨다. 액자의 경우 전설적인 작곡가로 남은 베토벤의 삶을 무대 위에 그린다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뮤지컬 '잃어버린 얼굴 1895',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역사적 인물의 삶을 그리는 데 있어 액자를 소품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본 작품에서는 베토벤의 유명한 음악인 <비창>, <월광>, <운명> 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베토벤의 강렬하고도 역동적인 음악적 사조와 유사한 멜로디를 기반으로 창작된 넘버가 조화를 이룬다. 베토벤의 익숙한 음악을 무대 한 편에 위치한 피아니스트의 연주, 배우들의 연주로 직접 감상함과 동시에 베토벤의 삶을 베토벤의 음악적 특징을 살려 작곡한 넘버들로 이루어진 전반적인 극과의 결합을 통해 베토벤의 삶과 그의 음악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넘버가 피아노 선율로만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를 꽉 채웠다. 중간중간 삽입되는 금관악기, 목관악기의 사운드는 전반적인 피아노 연주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연출에서 강조되었던 것과 그렇기 때문에 인상 깊었던 점은 청력을 읽어가는 베토벤의 상황을 음향적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베토벤이 청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고, 그 순간 공포심 또한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귀가 먹먹하게 들리는 느낌을 사운드로 절묘하게 표현하였으며, 동시에 하얀 조명을 가느다랗게 이용해 베토벤의 귀를 관통시킴으로써 더 이상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을 더욱 입체적으로 강조하여 그가 느낀 절망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을 관객에게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관객의 감정이입을 고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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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무대 위에 아역배우를 등장시키는 것은 까다로운 작업인 만큼 대학로 극장에서는 아역 배우를 찾아보기 힘든 것과 달리, 본 작품에서는 아역 배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는 루드윅의 어린 시절, 발터, 카를의 어린 시절을 다채롭게 연기한다. 이런 연출은 뮤지컬 ‘모차르트!’(EMK 제작)에서의 아역배우를 떠올리게 하며 두 작품을 비교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뮤지컬 ‘모차르트’에서 아역배우가 맡는 아마데는 신이 주신 모차르트의 음악적 재능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오직 모차르트의 눈에만 보이며 일평생 그를 쫓아다닌다. 이렇게 대비되는 연출은 모차르트의 음악은 신에, 베토벤의 음악은 인간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과 연결된다. 모차르트는 ‘신이 주는 재능’이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베토벤은 청각장애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한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 작품에서 베토벤이 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더 위대한 작곡가로 나아감에 있어서 “이미 내 안에 음악이 있고, 그 음악은 완벽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외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완벽한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렇듯 연출, 조명, 무대, 음악 등 한 작품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만큼 베토벤의 생애를 보다 음악적이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의 비극적이었던 삶에서 관객은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하며 그가 마리와 카를과의 관계 속에서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관객에게 마침내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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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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