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때 청춘이자 지금 청춘인, 모든 '한스'들에게 [도서/문학]

젊은 헤르만 헤세의 자전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글 입력 2022.12.0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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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이 된 나는 비로소 내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어른은 이런 모습은 아니었는데. 나이 한 살 더 먹는다고 대단히 성숙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스물은 다를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었나 보다.

 

사회에서 성인이 되었다고 인정해줬을 뿐, 오늘의 나는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그대로인데. 하지만 스무 살이 주는 그 설렘이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운 마음도 잠시 나는 스스로 어른이 된 양 착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 풋풋함을 그리워하지만, 당시에는 그 찬란함을 미처 다 느낄 새도 없이 일년이 금방 지나갔다. 특별할 줄 알았던 스물이 생각보다 심심하게 끝났다는 데서 굉장히 허무했던 것도 같다. 스물이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 끝자락에 이르러서 아직은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었다.

 

스물다섯 즈음에는 왠지 온전한 어른의 형태에 가까워질 거라고 상상했다. 하지만 기어코 와 버린 올해 초, 방황을 끝내지 못한 내 모습을 보면서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시인했다.

 

사실 그 ‘여전히’에는 모순적인 양가감정이 담겨 있다.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핑계에 숨어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한편으로는 아직은 현실에 찌들지 않았기에 순수함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십대의 정 가운데를 벗어나면서, 지금의 내가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어른이 아닌 상태도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 잔나비, 꿈과 책과 힘과 벽 中

 

 

작년 이맘때쯤 잔나비의 ‘꿈과 책과 힘과 벽’이라는 노래를 즐겨 들었다. 어른이 되지 못한 스스로가 조금은 미웠던 당시 나를 위로했던 노래의 가사가 이제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공감이 된다. 누군가의 무덤덤한 눈빛에 상처를 받았던 내가 이제는 조금 무심해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씁쓸한 자각을 한 것이다.

 

내가 한창 수험생이었던 시절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막내 동생이 얼마 전 수능을 치르고 왔다. 고작 6년이 지났을 뿐인데, 그 때의 여린 마음을 온통 잊고 어설프게 어른이 되어 동생의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밤새 마음이 심란했다. 어른이 되지 못한 나보다, 애매하게 미성숙한 어른이 된 내가 더 싫었던 밤이었다.

 

 

선생들은 언제나 죽은 학생을 살아있는 학생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바라본다. 

잠시나마 돌이킬 수 없는 모든 삶과 젊음에 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가슴 깊이 되새겨보는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년의 가슴에 상처를 입히면서도.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134p 中

 

 

올 여름에 읽고 굉장히 가슴에 깊이 남았던 구절이다. 당시에는 상처 받은 소년의 입장에서 감동을 받았는데, 지금은 상처를 주는 선생의 입장에서 깊이 반성을 한다. 한 때의 상처를 잊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저 그런 어른이 되었다는 점이 씁쓸하다.

 

아물었지만 흉터로 남은 상처가 욱신거리며 양심을 괴롭힌다.

 

 

 

젊은 헤세의 자화상…그리고 모든 우리의 한스들에게


 

지나치게 진지한지도 모르지만, ‘가장’, ‘최고’, ‘인생’ 등의 수식어을 붙이는 데 인색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냥 좋아하는 것들을 꼽으라면 쉽게 고를 수 있지만, ‘가장’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괜스레 부담스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안’은 그런 부담 마저도 떨쳐 내고 인생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작품이 되었다. 십 여년만에 다시 읽은 ‘데미안’에 푹 빠져, 헤르만 헤세의 열렬한 팬이 되었을 만큼.

 

하지만 ‘데미안’을 인생 책으로 꼽는 것과는 별개로, 이 책이 어째서 ‘청소년 권장 도서’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솔직히 이십 대가 되어 다시 읽었지만 완벽히 이해되지 않을 만큼 난해한 내용을, 권장 도서라는 압력으로 어린 친구들에게 읽히는 게 다소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은 내가 그랬다. 책과 꽤 가까웠던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데미안’을 읽고 책에 대한 흥미를 모조리 잃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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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를 읽는 내내 오히려 이 책이 권장도서가 되기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스 기벤트라’라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를 빌려 전해지는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사실 과거의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또 다른 현 시대의 청소년의 이야기가 될 것도 같았다. 고전이 지닌, 시공간을 초월하는 공감과 교훈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와 닿았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책을 덮는 순간 ‘수레바퀴 아래서’가 권장도서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을 철회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두 작품 모두 방황하던 헤세의 젊은 날을 담고 있다. 데미안을 먼저 읽었던 나는, 싱클레어가 그랬듯 한스 역시 주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다.

 

그러나 자살인지 사고인지도 모를, 지독히 비극적인 결말은 한 동안 충격에 빠져 그 여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성적과 성공의 압박, 어른들의 억압에 짓눌린 모범생 한스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공감의 깊이 때문에라도 이 비극적인 결말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헤르만 헤세의 생애를 들여다 보면, 그가 왜 이리도 방황하는 청춘의 이야기를 많이 그려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어렵게 입학한 신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대장간의 견습공이 되어 비극적으로 삶을 마무리한 한스는, 수도원 학교에서 도망친 뒤 시계 공장과 서점에서 견습 사원으로 일하다 자살 기도를 했던 젊은 날의 헤세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억압적인 신학교 생활에서 한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문학도를 꿈꾸던 자유로운 영혼 헤르만 하일너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또 다른 헤르만 헤세의 이상적인 자아상처럼 느껴진다. 한스가 고향으로 돌아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떠올리는 소꿉 친구 헤르만 레히텐하일은, 헤세가 그리워하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추측되기도 한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나오는 한스를 포함한 여러 ‘헤세’들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것과는 달리, 비록 그 내면의 방황은 더욱 짙어졌으리라도 주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그 성숙한 모습에서 헤르만 헤세의 내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소년은 한창 피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꺾여

즐거운 인생의 행로에서 억지로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262p 中

 

 

꽤나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이십 대 초반을 꿈을 찾아 한없이 방황했던 나는, 꿈의 형태를 갖추어 나가는 이제야 비로소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진심으로 깨닫는다.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20세기 최고의 대문호 역시 세상의 권위에 맞서 주체적인 삶을 향해 나아가려고 끝없이 고뇌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은 참으로 잔인한 구석이 있다. 숫자로만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은 어른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앞에서 승자보다는 훨씬 많은 패자를 양성한다. 한 사람의 가치와 삶의 의미는 절대 채점할 수 없는 것임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성취감보다 좌절로 스물을 맞이한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진다.

 

입시가 마무리되어가는 지금, 한 달 여 뒤면 어엿한 어른이 될 우리 열 아홉 살의 청춘들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의 주인인 너희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란다. 어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바라는 주체적인 삶임을 잊지 않기를. 부디 사회가 내미는 차가운 성적표에 주눅들지 말기를.

 

나는 오늘 조금은 무덤덤한 어른이 된 것을 반성한다. 한 때의 한스였던 우리 어른들 역시, 순수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큰 시험을 치른 우리 아이들을 그저 따스하게 안아 주기를 바란다.

 

 

 

그게 어떤 ‘수레’든 상관 없으니


  

 

“아무튼 지치지 않도록 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게 될지도 모르니까.”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146p 中

 

 

작품의 중반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도 제목의 의미를 전혀 추측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방황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와 수레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작품을 끝까지 다 읽은 지금은 정말로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서 ‘수레’는 우리의 인생을 의미한다. 수레바퀴 아래 깔린 한스의 삶은 기성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삶에 억눌린 한 청춘의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한다. 수레가 우리의 인생이라면, 그 수레에 실을 것을 정하는 사람은 자신이 되어야 하며, 수레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수레를 끌어가는 삶을 사는 것이 옳다.

 

삶에 끌려가던 한스는 결국 지칠 수 밖에 없었고, 스스로 실은 적 없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수레바퀴 아래 깔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의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을, 사회가 바라는 이상적인 방향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바라는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을. 젊은 시절 한없이 방황하던 헤르만 헤세는 작품을 통해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른들이 가르쳐야 하는 것은 수레에 무엇을 실어야 하는 지가 아니라 수레를 직접 끌고 나가는 방법이다. 아이들 스스로 정한 삶의 무게를 혼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뒤에서 조용히 수레를 밀어주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 아닐까.

 

우리 사회가 마련해야 하는 것 역시 이상적인 삶의 기준이 아니다. 스스로 원하는 목표를 싣는 것이 이상적인 삶임을 가르치는 것, 수레가 무겁거나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다치지 않는 길이 되어주는 것, 잠시 멈추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아닐까.

 

지금 방황하고 있는 ‘한스’들과, 이제는 어른이 되어 버린 한 때의 ‘한스’들. 그 모든 한스들이 원하는 삶을 싣고, 자신이 정한 방향을 향해 직접 수레를 끌고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게 어떤 수레든 상관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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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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