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는 상처보다 흉터에 가깝다 – 흉터 쿠키 [도서]

글 입력 2022.11.18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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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미 시인은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는 상처보다 흉터에 가깝다. 몸과 마음에 찾아오는 통증, 시간이 흩어지며 남는 흉터들. 흔적은 흐릿해져 가지만, 작게 남은 흉터는 그것이 분명 존재했던 사건과 시간임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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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출판사의 핀 시리즈로 찾아온 이혜미 시인의 시집 “흉터 쿠키”다.

 

한 손에 들어오는 크기, 단단하게 안정감을 주는 표지, 미색의 종이 사이사이 배어든 이야기들. 시인은 조용한 슬픔의 시간, 그 슬픔이 아물어가는 시간, 끝내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졌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비슷한 각도로 기울 수 있다면 좋겠어


 

마음도 음이구나

 

 

돌이켜보면 헝클어진 속내였겠지 음…… 대답을

미루는 얼굴을 살피며 잠시의 호흡과 모여드는 귓

속말을 얻고 싶었어 작은 흔들림에도 서둘러 웃음

을 깨트리면서 


비슷한 각도로 기울 수 있다면 좋겠어 같은 음악

을 듣는 지금이 너무 거대해 전생처럼 느껴지니까

우리는 미래를 모르는 대신 음악을 선물 받은 거야

모르는 시간을 알아가는 사건이 모여 세계의 형식

을 만드는 것처럼 생각이 서로에게 얽히고 무너지

다 문장이 되고야 마는 것처럼

 

- p.19 '음' 中

 

 

음… 하고 한 음절을 소리 내 발음해 본다.

 

음악의 구절이 되는 음계를 말하는 ‘음’ 같기도, 대답을 망설이면서, 아니면 잠시 생각에 잠겨 내뱉는 ‘음’ 같기도 하다. 시에서도 ‘음’은 여러 의미로, 여러 표현으로 등장하고, 그것은 어딘가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이 떠다닌다.


비슷한 각도로 기울어 같은 음악을 드는 지금. 전생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순간. 좋아하는 것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달뜬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에서 수없이 스쳐 지나갈 수많은 음악들 사이에서, 마음을 온전히 빼앗긴 곡이 있다고.

 

그 곡의 이런 발상과 흐름이, 들리지 않는 사소한 부분들까지, 왜 그렇게 좋은지를 이야기 나누고 싶다.

 

 

 

기분의 단면을 본 적 있니


 

기분의 단면을 본 적 있니. 아무리 얇게 잘라도 기어코 생겨나는 양면을. 그래서 포옹은 하나가 될 수 없는 서로의 확인이야. 껴안은 품이 환하게 열리는 자리에서 열매는 언제나 되돌아오고 이름의 모서리는 닳아가지.

 

- p.29 '여름 자두 깨물면서' 中

 

 

이럴 때 글을 읽는 기쁨을 느낀다.

 

어떤 대상에 대해 특정한 감정을 느꼈을 때,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 지나치고 마는 때가 종종 있다. 시가 그 기억을 다시 되살려 낸다. 그리고 정확히 내가 느낀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생각의 흐름과 영향이었는지, 나는 무엇에 반응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한다.


기분이라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삼차원의 공간으로 불러온다. 면과 면을 지닌 기분은 결코 단면을 드러내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현실이 되어 더없이 기쁠 때, 어쩐지 함께 찾아오는 불안함과 슬픔을.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이 지쳤을 때, 작은 모퉁이에서 빛을 밝히던 희망을.

 

늘 서로 다른 기분이 함께 찾아오는 순간들을 그려낸 표현이었다.

 

 

 

우리는 발생하는 중이지


 

새벽에는 어둠이 다 빠져나갈 만큼 긴 날숨을.


이른 아침에는 온몸이 파도로 가득 찰 만큼 느린 들숨을.

 

 

눈을 깜빡이는 자리에 신은 잠시 앉았다 가는 거야.


흘려둔 빛을 모아 겨울잠을 준비하는 나무들에게 선물하려고.


뭘 잃어버렸니? 물어오는 다정한 언니들과 함께.


마주 보며 호흡할 때 우리는 서로에게 부드러운 물결을 선물하는 거야.


- p.46 '스파클 다이브' 中

 

 

아름답고 유려한 글을 읽으면 마음이 가득 채워진다. 현실의 슬픔과 피로는 잠시 사라지고, 평온하고 고요한 세계에 발을 딛는다.

 

이혜미 시인의 시집엔 섬세하게 마음과 세상을 그려낸 글들이 많았다. 영원한 것은 없고, 자꾸 깨지는 일상의 조각조각. 쌓여만 가는 아픔에 지칠 때, 시집에서 마음의 평안을 찾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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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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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손잎
    • 시의 단어나 표현이 와닿네요.잘 보았습니다.^^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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