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직도 끊임없이 가지를 흔드는 전통의 가치 - 정조, 화성궐리사를 세우다

글 입력 2022.11.0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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궐리사는 중국 곡부에 있는 공자의 사당을 가리키며, 공자의 후손이 대대로 관리한다. 중국에서 궐리사는 공자의 후손들을 지원하여 공자의 사상에 관한 존경을 표방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하는데 사용되었다. 유교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조선에서도 궐리사가 두 곳설립되었다.

 

첫번째는 논산에 있는 노성 궐리사로, 숙종 42년(1726)에 전라도 지역의 유지들이 공자의 화상을 봉인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두 번째는 화성에 있는 오산시 궐리사로, 정조 16년(1792)에 정조가 직접 세우고 왕권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지역의 유지가 설립한 노성 궐리사와 달리 화성 궐리사는 정조가 직접 설립하였다.

 

오늘 리뷰할 공연 '정조, 화성 궐리사를 세우다'의 배경은 화성 궐리사다. 화성 궐리사의 진가를 느끼기 위해선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이후로, 정조는 왕권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정리하고 사당인 수은묘를 설치하였다.

 

이후 즉위 13년 개혁정치를 위해 수원화성을 건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수원부에 공서린이 서재를 세우고 후학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았다. 정조는 공서린에게 시호를 내리고 공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처럼 화성의 궐리사는 교육시설이자 공자의 이념을 받드는 장소이자, 정치개혁을 도모한 정조의 야심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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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간으로부터 살아남은 전통적 가치


 

화성 궐리사의 계단을 올라가 외삼문을 들어가면 크게 드리워진 은행나무가 드리워져 있다. 따스한 황금빛으로 가지를 내뻗은 은행나무는 오랜 시절부터 수호목의 역할도 수행해왔다.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곳에서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기 때문에, 은행나무는 유학을 상징하는 나무로써 선비들이 그 아래에서 공부하는 곳이라는 상징도 하게 되었다.

 

궐리사의 은행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공자의 후손 공서린은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쳐 후학들의 학업을 독려하였다. 공서린이 죽자 은행나무도 죽었는데, 어느 날 봄 은행나무의 씨앗이 자랐다. 거짓말처럼 정조가 이곳을 발견하여 사당을 세워 후학을 독려하고 오늘날까지 교육 프로그램이 꾸준히 기획되니 이 설화는 오늘날까지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삼문으로 들어가 바로 보이는 두 개의 내삼문을 들어가면 성상전과 성묘가 있다. 성상전은 공자를 중심으로 네명의 제자(안자, 증자, 자사, 맹자)가 조각되어 있다. 성상전과 성묘의 조합으로 이곳이 누구를 기리는 곳인지 금방 알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다. 일자무식한 입장에서 두 해태를 포함한 복잡한 조각상의 의미와 각 조각 밑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한자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공자의 본가에서 들여왔다는 설명을 듣고 그 공경심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궐리사를 방문한 대부분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성묘 앞에 있는 향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300년이나 된 향나무는 태풍으로 약간 누운듯한 모습을 하였는데, 꺾였지만 튼튼한 몸통으로 위를 향한 그 모습이 매우 인상 깊었다. 큰 재난을 겪고도 하늘을 뻗어 살아있는 향나무를 보면서 공서린의 설화를 떠올렸다면 좀 우스울까? 급변하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다 보면 때로 유학사상과 같은 전통적 가치 다시 살아날 수 없는 죽은 은행나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어떤 고유한 가치는 고집스럽지만, 역동적인 모양새로 그 생명력을 이어나가기도 한다.

 

궐리사는 약간 언덕 같은 곳에 걸치듯 앉아있다. 성상전과 성묘 뒤에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드리워져 있고 살짝 위에서 살피면 정갈한 궐리사 전체 경관이 정리되어 보인다. 궐리사 주변에는 딱딱한 건물이 자리하고 있지만, 외삼문 안은 계절감이 느껴지는 나무들로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작은 곳이지만 역사적 의미와 일본강점기를 넘어 보전된 어떤 가치를 찾아낼 때 약간의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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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지에 바람 불듯 붉은 옷자락 팔락이며



작은 사당에서 고집스럽게 자라는 향나무와 은행나무. 궐리사를 탐방하고, 그와 관련된 연극과 강의를 누리면서 내가 지속적으로 느낀 풍경이 이런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유교적 가치는 때로 단순한 구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향나무와 은행나무를 바라보다 보니 고집스럽게 지켜왔던 역사적 가치는 단순한 향수감 이상의 무언가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공자의 사상은 혼란스러운 사회상에서 질서를 잡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었다. 사회가 급변함에 따라 몇몇 부분은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지만, 그가 목표로 했던 것이 인간성의 회복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정조는 정치적 희생양인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다. 그에게 왕권을 안정화하는 것은 단순히 왕으로서의 목적만도, 생존을 위해서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묘소를 정리한 그의 마음을 단순한 정치적 횡보로만 정리하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감상적인 평가를 제쳐놓고, 그는 새로운 조선을 세우고 싶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정조 이후 지역 유지들의 끊임없는 관심으로 궐리사는 잘 보전되어 2022년에 도달했다. 궐리사는 위대한 사상가에 대한 진심 어린 공경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벼락을 맞았지만, 더 역동적인 자세로 자라난 두꺼운 줄기처럼 살아남았다.

 

10월 29일 궐리사의 마당에서 공연된 '정조, 화성 궐리사를 세우다'는 현대사회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공연은 여섯명의 퍼포먼서와 첼리스트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각 맴버들은 전통복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옷을 입고 있다. 누군가를 그리는듯한 애절한 노래를 시작으로 공연의 한쪽에는 은행나무를 형상화했다. 그리고 그 중간을 붉은 옷을 입은 무용수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춤춘다.

 

무용수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했는지는 각양각색의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그것이 앞서 말한 불변하는 가치라고 생각했다. 마침 포스터에서도 붉은색으로 칠해진 정조가 중간에 배치되어있는바, 오랜 역사 동안 살아남은 은행나무의 씨앗, 즉 불변하는 가치가 아직도 가지를 흔드는 것으로 느껴졌다.

 

연극은 초반부에는 추상적인 표현으로 시작되었지만, 노래를 부르던 배우가 나레이터 역할을 맡은 후부터는 마당에서 이루어지는 연극처럼 진행된다. 연극은 사도세자의 죽음, 공서린의 후학양성, 정조의 즉위로 이어진다. 움직임과 발성 방식은 세련되었지만, 대사나 흐름 자체는 직관적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정조가 사대부와 다투는 장면이었다. 일종의 전 대물처럼 표현되었는데, 아름다운 첼로 소리와 어우러지자 정말로 독특한 매력이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많은 관람객이 초등학생이었기에 이런 표현방식을 선택한 것이지만, 어른으로서는 이런 표현에서 정말 독특한 감상을 느꼈다. 보통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배우들은 정면을 보고 연기하고, 약간 애절한 음악과 상황에서 익살스럽게 행동했다. 20분 동안 연극은 빠르게 사라진 붉은 옷자락처럼 끝났다. 마지막에는 선물을 미끼로 수많은 아이가 뛰쳐나와 마당에 등장하는데 아마 이 부분이야말로 오늘 극단이 그리고 싶었던 그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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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가며



공서린은 은행나무를 직접 심었다고 한다. 화성 궐리사는 공자의 후손들이 운영한다는 의미를 통해 그 의미를 강화하고, 이러한 건립을 통해 화성에 '궐리'라는 지명도 부여하였다. 정조의 행보는 공자의 학문적 가치를 계승과 새로운 도시를 육성이라는 두 가지 구상을 드러낸다. 은행나무가 더 환한 빛으로 물드는 가을은 정조가 궐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명령한 계절이다.

 

화성 궐리사는 1994년 4월 20일 경기도 기념물 제 147호로 지정되었다. 벼락을 맞아도 위로 뻗어 나간 향나무처럼, 정조가 방문했을 때 죽은 나무 위에서 태어나 아직 많은 이들 위에서 팔을 흔드는 은행나무처럼 그 가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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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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