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거대한 가문, 작고 평범한 개인 -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글 입력 2022.11.0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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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엘리자벳>을 보았다. 평소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중소형극만 봐서 한번쯤은 대형극의 화려한 규모를 만끽해보고 싶었다. 역시나 <엘리자벳>의 규모와 앙상블의 활용, 수시로 바뀌는 무대 배경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호화로운 볼거리를 즐겼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화려한 배경도, 대규모로 동원된 앙상블도, 그 시대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의상도 아닌 엘리자베트의 쓸쓸함이었다.

 

뮤지컬에는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의 1865년작 <엘리자베트 황후> 그림이 중앙에 걸리고 황후를 연기하는 배우가 똑같은 옷과 포즈로 그림을 재현하는 장면이 있다. 내가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라는 책에 매료된 데는 표지에 장식된 그림이 한몫했다. 뮤지컬로 먼저 접한 그 가녀린 영혼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갈 기회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표지평면.jpg

 

 

표지를 엘리자베트 황후가 장식하고 있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연히 이 책은 그녀만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13세기에서 20세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유지되며 한때는 유럽 전체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합스부르크’라는 가문 전체의 역사를 모두 다루는 책이다.

 

지금 우리가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듯이 당시에는 화가의 그림이 있었다. 수많은 궁정화가의 섬세한 그림은 21세기 민주주의를 사는 우리도 생생하게 그 가문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이 책은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라는 제목에서 ‘명화로 읽는’ 보다 ‘합스부르크 역사’라는 말에 중점을 두었다. 이 책에서 그림은 합스부르크 가문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는 시각적 자료일 뿐, 핵심은 그 가문의 개개인이 어떤 일을 겪었느냐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습은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이 대부분이다. 결정적으로 근친혼이 그렇다.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을 그린 그림에는 턱이 길게 늘어진 묘사가 자주 보이는데. 이 턱이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에서 고질적으로 드러나는 증상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유전병까지 일으키는 근친혼 문화를 오랫동안 유지한 데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순수성에 대한 자부심으로 함부로 낯선 집안의 천한 피와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다. 한 명이라도 다른 가문과 결혼하면 그 길로 가문의 순수성은 훼손되고 이는 명예를 중요시한 가문 어른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 해당 가문에는 유독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흔했고 요절이 자주 일어나면서 운명의 나침반이 여러 번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습과 일반인은 꿈도 꿀 수 없는 명예와 권력에 위화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만약 당시 저 시대의 백성이었다면 왕가의 행보를 어떻게 바라봤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에서 멀어지면 감정도 차분해진다. 나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격동의 시간을 보냈을 때에서 몇백 년은 지난 21세기를 살며 저 먼 한국에서 여유롭게 그들의 이야기를 제삼자의 시선에서 읽을 수 있었다. 객관적인 시선을 갖추면 당사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다. 나의 눈에 보인 건 거대한 가문이 미처 품지 못했던 한 명 한 명의 감정이었다.

 

 

 

어떤 슬픔은 광기의 형태를 띈다, 광녀 후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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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프라디야, 광녀 후아나


 

책에 소개된 12점의 그림 중 유독 인상 깊었던 세 점의 그림이 있다. 그중 하나가 <광녀 후아나>였다. 남편의 시신을 옮기는 행진 중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일으키고, 수시로 시신의 안위를 확인하며 수도원을 눈앞에 두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기도하는 이 기이한 광경은 한 번 눈으로 본 이후로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남편의 죽음에 아내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배경을 모두 읽고 나면 새삼 후아나의 절망이 단순한 연정이 아니라 광기처럼 느껴진다. 아라곤 왕가 카스티야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후아나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언니와 오빠가 모두 사망하며 차녀로서 왕위를 계승 받게 되었다. 왕인 아버지가 살아있었지만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별개의 왕국이었기 때문에 별도의 왕위 계승이 필요했던 거였다. 이런 상황의 후아나와 결혼하게 된 펠리페는 왕이 아니라 여왕의 남편이 된 자신의 상황에 불만을 토로했다. 왕위를 넘보는 남편과 이를 지키고자 카스티야 왕을 겸임한 아버지 사이에서 후아나는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고, 갈등이 갈무리되지도 않았을 시점에 펠리페가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된다.

 

후아나와 펠리페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분명 화목한 시기가 있었겠지만, 후아나가 장녀에 이어 아들을 낳은 이후에는 펠리페도 아내가 지겨워졌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외박과 외도를 일삼았다고 한다. 펠리페의 사망이라는 비극을 겪기 전에도 이미 후아나의 마음은 질투와 외로움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나를 사랑해주기는커녕 견제의 대상으로만 보는 남편의 죽음에 이렇게까지 절망하는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단순히 부부 사이의 애정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후아나를 외롭게 만든 수많은 요소가 그녀의 정신을 벼랑 끝까지 몬 결과라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죽을 때까지 유폐된 후아나는 75세까지 장수하며 단조롭지만 평화로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왕과 여왕 사이에서 태어나 왕권을 사투하며 지내기엔 그리 독하지 못했던 그녀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으면 유폐가 아닌 보다 자유롭게 평화를 즐기며 인생을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살기엔 너무 순진했던 두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엘리자베트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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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엘리자베트 황후

 

 

서두에서 밝혔듯 뮤지컬 <엘리자벳>을 먼저 보아서 특히나 엘리자베트 황후의 그림을 설명하는 부분이 이해가 잘 되었다. <엘리자벳>을 보면서 엘리자베트와 조피 대공의 관계가 사도세자와 영조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자유분방하고 순진했던 그 성미가 단지 왕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당하는 모습에서 겹쳐보였다.

 

엘리자베트가 처음부터 황후가 될 운명이었던 건 아니었다. 집안의 어른들은 프란츠 요제프를 그녀의 언니인 헬레네와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요제프는 언니를 따라 온 동생 시씨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 동생이 바로 엘리자베트 황후인 것이다.

 

책에서 설명된 그녀의 생애는 뮤지컬 <엘리자벳>의 줄거리와 거의 같다. 3시간 동안 진행되는 웅장한 극이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것 같아 개인적으로 뮤지컬에 대한 감상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엄격한 황후의 삶과 엘리자베트의 자유로운 성격은 시작부터 불협화음을 냈고, 그녀는 결국 끝까지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불안하고 외로운 나날을 보내다 ‘왕족이라면 누구든 좋았던’ 무정부주의자에 의해 생을 마감했다.

 

책을 읽으면서 유독 가슴이 아파 깊이 탄식한 부분이 있다.

   

 

결혼도 그렇고 죽음도 그렇고, 어째서 그녀는 중요한 순간마다 다른 인간에게 가야 할 것을 떠안게 되는 걸까? 

 

- p. 211

   

 

어떤 운명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힘에 미친 개인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벽을 허물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겠지만 그 당시 왕가의 여인이, 그것도 무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인이 주체적으로 산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책을 읽은 이유도, 가장 친숙한 이도 엘리자베트 황후였지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문장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때때로 예술가가 세계를 아우르는 대단한 소재 대신에 사소해 보이는 소재를 통해 자신의 창작력을 증명하는 것처럼, 운명 역시도 별볼 일 없는 주인공ㅇ을 찾아낸다. 그래서 부서지기 쉬운 재료를 가지고도 최고의 긴장감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연약하고 의지가 부족한 영혼을 통해서도 위대한 비극을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일 때가 있다. 그때 우연히도 주역을 맡게 된 가장 아름다운 비극의 예가 마리 앙투아네트다.

 

-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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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와 아이들

 

 

(당연히)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와 집안의 이해관계에 의해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한 마리 앙투아네트. 아름다운 외모의 젊은 왕비로서 프랑스 국민에게 환영받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는다는 오만에 빠져 왕비에 걸맞지 않은 방탕한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신체적인 문제를 외면하는 남편 때문에 후계자도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의 방황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루이 14세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국고는 루이 16세에서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굶주림에 분노하던 국민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를 분노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가 어머니가 되어 드디어 왕비다운 왕비의 태세를 갖추려 할 때 말이다. 그리고 그 분노의 결과는 모두가 아는 프랑스 혁명과 단두대 처형이었다.

 

고작 100년도 다 살지 못하는 한 인간의 삶에서 몇백 년에 걸쳐 이어진 가문의 역사는 너무나 방대하고 위대하다. 그러나 그 위대한 합스부르크의 영광도 결국엔 저물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길고 화려했던 가문의 영광은 책 한 권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지금은 영원할 것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에 휩싸여 상처받은 영혼의 울부짖음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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