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상적인 것'의 재치 있는 뒤틀림 - 레안드로 에를리치 '바티망'

글 입력 2022.08.12 01:1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좌) 비행기(El Avión ,2011) _ (우) 야간 비행(Night Flight, 2015).jpg


 

며칠 뒤면 해외여행을 떠난다.

 

‘현생’을 살아내랴, 여행 준비하랴,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다 보니 마냥 설레기보다는 많이 지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여행에 있어 가장 피곤한 관문이자, 동시에 설레는 여행의 상징이기도 한 것은 아마 비행기를 타는 일이 아닐까 싶다.


비행기는 참 묘한 공간이다. 시간도 위치도 확실치 않은 유동적인 공간. 그러나 그 안의 모습과 창밖의 풍경은 늘 비슷하기에, 거의 모든 이들이 비행기를 생각할 때 어느 정도 유사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시공간적 정의가 어려운 대상에 대해 자연스레 같은 이미지를 공유한다는 사실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I believe that there is no better place to question reality than within the plane that we consider natural, normal, ordinary.

 

- 레안드로 에를리치

 


아르헨티나 출신의 현대미술 아티스트 '레안드로 에를리치' 또한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기에 비행기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고 말한다.


한, 아르헨티나 수교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들섬에서 개최된 <바티망>에서는 비행기의 창밖 풍경을 재현한 영상 작품 '비행기', '야간 비행'이 전시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다. 마치 긴 비행이 여행의 시작을 알리듯 말이다.

 


세계의 지하철(Global Express, 2011).jpg


 

'세계의 지하철'은 비행기보다 훨씬 더 일상적인 대상인 지하철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도시의 일상을 지나쳐 달리는 지하철은 지하 터널을 한참 지나기도, 고가 철로를 달리기도 하며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건물숲이나 터널을 지나고 나면 어느새 창밖의 도시는 바뀌어 있다. 뉴욕과 파리, 도쿄를 오가는 이 지하철의 창문을 통해 나는 일상과 비일상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창 밖의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일상, 누군가에게는 여행일 것이다. 각자의 이유로 지하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여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여행과 일상의 모호한 경계점에서, 내가 어느 장소에 존재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때로는 아주 일상적인 공간도 새롭게 지각하게 되곤 하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의 지하철', '비행기'처럼 일상과 현실을 다룬 예술 작품은 항상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잃어버린 정원(Lost Garden, 2009).jpg

 

 

노들섬에서의 이번 전시는 영상과 사진 작품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정원', '교실' 등의 설치 작품을 선보이고, 에를리치의 대표작인 '바티망'을 서울에서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정원'은 사면체 모양의 공간이 육면체로 나타나는 완벽한 착시 효과를 보여준다. 거울을 이용하여 연출했기 때문에 정면의 창문 너머에는 실제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고, 측면의 창문 너머로는 나 자신과 마주보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착시를 통해 공간의 모양이 바뀌고 확장 되었으며, 식물도 더 풍성하게 보이는 작품이었다. 작품의 제목 때문인지 잃어버린 환상의 정원을 되찾고자 하는 동화적인 소망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자 에를리치의 대표작인 '바티망'은 그동안 봐온 관객 참여형 예술 작품 중에 단연코 가장 돋보였다. 그저 정해진 포맷에 참여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 또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섰을 때, 내 앞의 관람객들은 서로 다른 일행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지 같이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열성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인 바티망 경험'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티망'을 비롯한 에를리치의 설치 작품들은 문화적 차이나 언어장벽 없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다.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현실의 대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를리치의 작업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끈다는 사실은, 일상의 도시 생활 속에서도 웃음과 새로운 재미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간직한 이들이 많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바티망 전시 포스터.jpg

 

 

[송진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