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이 사는 그곳, 혹시 불편하진 않나요? [문화 전반]

장애인의 이동권과 주거권, 나아가 모든 동등한 권리를 위해
글 입력 2022.04.0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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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다가온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대개 그 순간은 ‘자각’을 통해 발생한다. 함께하는 사람의 한마디에, 그곳을 이루는 한 법칙에, 그 공간의 구조에 담긴 함의를 깨닫게 될 때 말이다. 이는 곧 익숙함 속에 지워진 존재들을 자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그 경험이 다시 발생했다. 내가 10살쯤부터 엄마는 10년이 훌쩍 넘도록 꽃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곳은 집과도 굉장히 가까워서 길을 지나가거나 심심할 때 들르는 놀이터와도 같았다. 그런 내게 꽃집은 너무나 당연하고 친숙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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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엔 턱이 있다.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바깥에서 구경할 수도 있지만 더 다양한 식물을 접하기 위해선 '높은' 턱을 넘어 입장해야 한다. 그곳을 별도의 노력 없이 자유로이 넘나들며 안에서 쉬고 있던 나의 눈에 전동 휠체어를 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손님은 바깥에 놓인 식물과 가게 안쪽을 오랫동안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내 구경을 마치고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내가 서 있는 위치에 기묘함을 느꼈다.

 

 

‘가게 턱이 엄청 높다. 휠체어를 타면 안에 들어올 수가 없겠네. 턱을 경사면으로 좀 깎으면 좋겠다.’


‘근데 휠체어 타고 다니는 사람이 정말 없어.’ 엄마는 일하느라 그분을 보지 못한 채 대답했다.


‘아니야, 내가 방금 봤어. 오랫동안 식물과 마주하고 있었어.’

 


생각해보니 읍내에 있는 수많은 가게엔 높은 턱이 있다. 그분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단 하나의 가게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사실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게 아닐까?' 이 한마디를 속으로 삼켰다.


그분을 맞닥뜨린 후 낯설게 느껴진 공간이 더 있었다. 우리 동네 도서관이다. 내가 사는 곳의 도서관은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도서관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뛰어날 정도다. 두 다리가 별 이상 없이 작동하는 나도 올라가기 힘들고 귀찮아서 자주 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곳. 그곳이 이동에 장애가 있는 이들에겐 얼마나 높아 보일까. 시골이라 원하는 책도 발견하기 힘든 작은 도서관인데. 그마저도 누리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사회는 얼마나 높은 벽처럼 느껴질까. 일상에 얼마나 그런 벽이 많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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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채널 <닷페이스>, <씨리얼>, <장혜영>(과거 ‘생각많은 둘째언니’)과 같은 채널을 보며 장애인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수많은 권리(대개 비장애인에게는 사소해서 인식하지도 못하는 권리)를 '포기당한' 채 생존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특히 그들은 아주 기본적인 주거권과 이동권마저도 약탈당하고 있다. 많은 장애인이 보이지 않는 외딴 시설에서 격리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보호라는 명목 아래 개개인의 삶은 지워지고 한 ‘수용인’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초석이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마련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자가 격리를 해봤을 것이다. 나도 군대에 있을 때 휴가가 끝나고 2주간 격리했던 경험이 있다. 격리의 삶은 달콤할 것 같았으나 그 맛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좁은 방 안에서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는다. 방에는 침대와 책상 옷장만이 전부였고, 그나마 핸드폰이 있었지만 이마저도 흥미를 금세 잃었다. 바깥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작은 창문을 내다보며 살랑한 바람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만 한다. 나의 상태와 취향에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의 음식이 제공된다. 만약 모자란다면 더 받을 길이 없다. 격리의 삶은 이러한 순환의 반복이다.

 

이 생활을 하며 적어도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온전히 관리받고 있다고 느꼈음에도 말이다. 의식주가 해결되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삶의 기본 요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의식주를 바탕으로 자신의 활동을 여러 방면으로 해나가는 것이 삶의 기본 원동력이다. 어떠한 인간도 예외는 없다.


그러나 장애 시설 수용인의 측면에서 보면 이처럼 배부른 격리도 없을 것이다. 언제든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핸드폰이 있고, 좁지만 온전히 혼자 그 방을 소유한다. 불편한 것을 건의하면 금방 상황이 개선된다. 격리는 삶의 전부가 아니라 기한이 정해진 일이자 휴식이다. 장애인의 격리 시설에선 정확히 반대로 이뤄지는 일들이다.

 

 

‘개인의 돌봄의 문제가 아니다.’

 


장애 인권 활동가인 김정하는 ‘향유의 집’이라는 장애인 시설을 운영하면서 이처럼 말했다. 아무리 부적절한 돌봄을 제공하는 이들을 제거하고 온 마음을 다해도, ‘격리된 시설’이라는 구조가 존재하는 한 절대 희망이 있을 수 없다고도 역설한다. 당연한 말이다. 단 2주의 격리 생활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몰개성적인 생활은 누구에게도 지속 가능하지 않고 강요되어선 더더욱 안 되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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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착취의 역사 속에서 장애인과 장애 활동가들은 기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점점 가시적인 운동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근 다발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의 행위는 정치권과 비장애인에게 약탈당한 권리를 되찾고 동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가고자 함을 밝히고 있다.

 

비마이너 하민지 기자의 말에 따르면 전국의 저상버스(경사면이 내려와 휠체어도 탑승할 수 있는 버스) 보급률은 30%가 되지 않는다. 교통의 중심지인 서울에서조차 50% 정도, 충북지역엔 오직 10%의 버스만이 이러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승강장이 없는 지하철역도 존재한다. 지하철도 없고 버스 자체의 수도 부족한 지방의 장애인들에겐 이마저도 꿈과 같은 이야기다.

 

이렇듯 사회는 장애인을 시민으로 인정 고려하지 않은 채 공간을 구성해왔다. 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든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지극히 비장애인 중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가다 발생하는 시위로 겪는 불편함을 장애인은 매 순간 겪었고 겪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불편함조차 느낄 수 없는 위치의 장애인도 많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일반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이조차 살아가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이것이 다른 이의 삶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장애인들의 반발감은 이러한 생각에 기저를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나도 지금 누군가에 의해 착취된 삶이 아닐까. 그걸로 보다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는 권력자가 있지 않을까.

 

그런 시각을 갖고 최근 다발하고 있는 장애인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향한 논의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삶에 큰 불편을 야기하고 있다며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대립 구도로 이어지는 현재의 경향은 반드시 지양되어야 한다. 물론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도 벅찬 이들에게 옆과 뒤를 바라볼 여유는 없어 보인다. 인정한다.

 

다만 개인뿐 아니라 이러한 모든 불편함을 이해하고 적극적인 행위로 개선해나가야 하는 인물은 바로 공직자들이다. 특히 법을 바꾸고 공간을 바꿀 영향력이 있는 고위 공직자들이다. 우리 손으로 그들을 그 자리에 선정한 이유는 이러한 일을 하도록 위해서다.


그러니 계속해서 같은 불편함이 발생한다면 장애인과 같은 약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동료 시민의 오랜 불편함을 제대로 해결할 의지를 갖지 않고 결국 이를 확산시키는 고위 공직자의 무능력과 나태함을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의 일이고 책임이다.

 

이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앞을 향해 나가면 탈락하는 사람이 더 발생하고, 그들에 대한 무관용은 결국 나를 향한 무관용으로 이어진다. 주류로 선택받기 위해 항상 긴장하는 그 모습은 얼마나 불안한가. 소수자를 위한 배려는 예외 없이 나에 대한 배려로 이어진다. 그것이 당연한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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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그동안 이런 약자를 떠안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제 그들을 계속해서 밖으로, 우리의 옆으로 데려와야 한다. 그것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은 당연하다. 성장을 위해 통증이 동반되듯이 잠깐의 아픔 뒤엔 더 큰 그림이 펼쳐질 것이다. 이를 위해선 지금까지 당연하다 여겼던 구조를 근본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그런 통증을 이해하고 감내하며 성장으로 만들어내는 태도, 그런 것이 적절한 의미의 뉴노멀이 아닐까.


유튜브 채널 <위라클>에서는 오스트리아에서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영상을 올렸다. ‘모두’의 안녕을 위해 설계된 도시는 모든 교통수단에 경사면, 블록이 아닌 평평한 아스팔트 도로, 턱이 없는 인도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의 기본적인 매너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 이동에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당연 귀감이 됐다. 이들을 동료로 인식하며 사는 영상 속 현지인의 말로 글의 마무리를 지어볼까 한다.


‘별도의 교육은 없다. 다만 함께 살아갈 뿐이다.’


그들이 일상에 더 많이 등장할 수 있을 때 사회도 당연히 그들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게 된다.

 

 

[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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