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웃지 않을 용기 [문화 전반]

어색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글 입력 2022.03.2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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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새해 다짐 중 하나가 ‘안 웃기면 웃지 말자’이기 때문이다.'
 

 

이슬아의 수필집 <심신단련> 속 이 문장을 읽고는 한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질 못했다. 생각해 보지도 못한 종류의 새해 다짐이기 때문이다. 안 웃기면 웃지 말자. 문장으로 써놓고 보면 '눈물이 나지 않으면 울지 말자'처럼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나는 안 웃겨도 웃는 사람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이제 그만할 때가 된 것 같다.

 

웃음이 헤프다. 거의 모든 농담에 웃는다. 별로 안 친하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의 농담이면 더 그렇다. 정말로 웃겨서 그런 것이면 참 좋으련만, ‘농담을 던지는 사람 앞에서 웃지 않는 법’을 몰라서 그렇다. 무례한 농담이든 그냥 안 웃긴 농담이든 그걸 던진 사람이 내 앞에 있으면 일단 웃고 본다.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어', '웃지 않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거야' 같은 생각을 하며 웃어넘긴다. 그렇게 웃고 나면 어딘가 씁쓸해진다.

 

가짜 웃음과 그 뒤에 따르는 씁쓸함의 원인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정세랑의 소설 <재인, 재욱, 재훈>을 읽다 만난 한 장면에 주인공에 나를 대입해 봤다.

 

 

실험실에 들어가기 전 에어샤워를 하면 웅팀이 말했다.

“재인 씨, 이제 우리 샤워도 같이 한 사이네.”

“팀장님, 그거 성희롱이에요. 완전 싫어요.”

“다른 팀원이 나한테 말했을 때는 재밌게 들렸는데, 미안해요.”

“하나도 재밌지 않아요.”

 

- 정세랑, <재인, 재욱, 재훈> p.95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에 웃기지 않다고 말하는 나.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 머쓱하게 사과하거나, 되려 뭐라고 하는 상대방. 무언의 눈빛을 주고받는 주변 사람들. 옳은 말을 했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만으로 불편해 견딜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쪽이 되기 싫기 때문에 실제로는 그냥 웃고 넘겼을 것 같았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알 수 없는 미시감이 들었다. 내가 걱정하는 그 상황 속에 '나의 기분'이 없던 것이다. 충분히 기분 나쁠만한 농담을 듣고도 분위기를 망칠까 봐 짓는 가짜 웃음의 원인은, 농담의 내용이나 내 감정이 아닌 '농담을 하는 사람의 기분'을 가장 먼저 신경 쓰는 데에 있었다. 내 행동의 이유에 내가 쏙 빠지니 씁쓸함이 남았던 것이다.

 

 

"혼자 하겠습니다. 안 잡아주셔도 됩니다."

"아, 예..."

그럼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간격이 벌어진다. 나는 그 상태가 딱 좋다. 어색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 이슬아, <심신단련> p.32

 

 

내 기분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 내 감정을 배신하지 않는 것. 그것을 위해 웃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선 어색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필수다. 웃으며 화기애애하느니 웃지 않아 어색해지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늘 새기기로 했다.

 

웃지 않을 용기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내가 웃으면 그 유머의 대상이 웃음거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나의 웃음으로 인해 인정받은 그 농담은 다음번에도, 그다음번에도 재사용 되면서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상처를 줄 것이다.


이렇듯 유머를 직접 구사하지 않더라도 웃는 순간 그 유머에 기여하게 된다. 웃음에도 책임감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유머는 더욱 그렇다. 책임감을 가지고 웃지 말아야 한다. 남을 우습게 과장해 따라 하며 반 친구들을 웃기는 친구나, 여장이랍시고 우스꽝스러운 행색을 하고 무대에 오르는 개그맨들을 향해 웃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웃지 못할 사람이 생기는 농담이라면 모두가 함께 웃지 말아야 마땅하다. 아무도 웃지 않는다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이다.

 

글을 마치며, 타인의 기분을 신경 쓰는 나의 천성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신경 쓰는 ’타인‘을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서 무례한 농담을 던지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웃는 순간 ’웃음거리‘가 될 이들을, 그들의 기분을 신경 쓰자는 것이다. 그들의 기분을 지키는 쪽이 훨씬 유의미할 것이니 말이다. 나에게 '웃지 않을 용기'는 말 그대로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웃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기꺼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웃음, 다른 이의 기분, 분위기 그 어떤 것보다도 나의 가치를 선행시키고 싶다. 가치가 선행된 웃음을 짓고 싶다. 그리하여 새해 다짐으로는 늦은 감이 있지만, 나 또한 다짐한다. 웃기지 않다면 웃지 말자고. 소중한 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지 말자고.

 

 

 

김지은 (1).jpg

 

 

[김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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