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누군가의 당연한 행복을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

느슨한 비건 지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글 입력 2022.03.1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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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 지향을 시작한 계기



채식을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채식 지향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건’이 있던 다음날,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윤기가 흐르는 돼지갈비의 뼈를 양손으로 붙잡고 뜯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미시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고개를 떨궈 두 손을 내려다보고는 중얼거렸다.

 

“얘는 자연사한 거겠지?”

 

생각해 보니 어떤 경로로 죽음을 맞이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자연사보다는 살해당했을 확률이 압도적이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러고는 눈을 떴다. 깨고 난 뒤에도 비릿한 고기 냄새와 끈적한 양 손끝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꿈이었다. 아마 그 꿈이 유독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의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의문은 최근 발견한 ‘물살이’라는 단어와도 이어졌다. 물살이는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잉 하고 있던 동물해방물결의 게시물에서 우연히 만난 단어다. 엄마 손을 잡고 동네 개천가에 유유자적 헤엄치는 잉어들을 손가락질하던 꼬마 아이였을 때부터 밥상 위에 올라가는 생선의 가시를 스스로 발라 먹을 수 있는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나는 물고기라는 단어에 한 번도 의문을 갖지 못했다. 물에 사는 생명을 지칭하는 언어가 식용하는 온갖 동물의 살이라는 고기와 치환될 수 있다는 현실에 놀라움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사는 ‘물고기’가 아니라 물에 사는 ‘물살이’였을 뿐인데도.

 

처음에는 미미한 충격을 느꼈을 뿐이었지만, 손톱 주위의 신경 쓰이는 거스러미처럼 그 단어는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의문에 의문이 들었다. 왜 이제야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걸까.

 

앞서 말한 ‘그 사건’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등장하는 퇴역 경주마 까미가 인간들로부터 무참히 학대당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해당 드라마에서는 말이 다리를 쭉 편 채 목이 뒤로 꺾이며 넘어지는 말의 모습이 송출되었다. 촬영 당시 영상이 확인된 결과,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십여 명의 성인들이 말의 다리를 묶은 와이어 줄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말은 격하게 넘어진 당시 몸체가 지면으로부터 90도 가까이 들려 있었으며 그 상태로 머리가 바닥에 곤두박질치고 난 뒤 한동안 움직임이 없었다. 후에 KBS 측에서는 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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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낙마 장면

 

 

스태프의 증언에 따르면 연기를 했던 액션 배우에게도 안전장치는 없이 일반 보호 장구만 주어졌고 그 역시 심한 충격으로 잠시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동물뿐만 아니라 사람 모두에게 불필요할 만큼 위험한 환경이었다. 실제로 이 낙마 장면에 대해 동물자유연대가 학대 의혹을 제기했을 당시만 해도 일부 시민들은 CG를 이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고 한다. 그만큼이나 가혹한 장면이었다.

 

서둘러 청원에 동의를 하고 인스타그램에 해당 사건과 관련된 게시물을 공유했다. 보지도 않았던 드라마였지만 보이콧하겠다고 결심도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슬픔을 누를 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관행처럼 이어져오는 방송 촬영 현장의 동물학대가 근절된 것은 아니니까. 촬영 현장에서 넘어진 자리에서 쓰러져 미동조차 없는 말을 살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방송사 측이 발표한 사과문에는 말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는 한 문장도 없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구태의연한 사과만 늘어놨을 뿐이었다.

 

그날의 깨달음은 내가 다른 존재를 타자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타자화. 다른 사람의 인격이 나에 의해 대상화(對象化) 되고 물화(物化) 되는 일. 타자화를 시킴으로써 그것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순간을 경계해야 한다. 타자에 대한 잠재적 폭력은 시작되는 순간은 대개 무언가에 무심해지는 순간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 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명으로까지 감수성을 넓혔더라면, 까미는 그토록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넓힌다는 것은 타자화되었던 것들을 나의 범주로 들인다는 것이었고, 나는 그동안 내게 타자였던 동물들을 차근히 나의 울타리 안으로 들였다. ‘비건 지향’이라는 삶의 방식을 떠올리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물을 학대하는 행위와 육식을 하는 행위가 같은 것은 아니기에, 혹자는 동물 학대 장면을 보고 비건 지향을 결심하는 행위에 괴리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나의 비거니즘 만화>의 저자 보선은 비건을 두고 육식을 ‘혐오’ 하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사랑’ 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도 그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의 총량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길 바라며 비건 지향을 시작하게 되었다.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모른다는 말로 도망치는 사람과 모른다는 말로 다가가는 사람, 세계는 이렇게도 나뉜다.

 

-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중에서

 

 

비건 지향을 결심하는 것에 또 다른 동기가 되었던 것은 요조의 에세이였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탈육식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사다 둔 지 6개월이 다 지나도록 좀처럼 펴보지 못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이 삼시 세끼를 다 따져가면서 식사를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앞섰던 탓이다.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나의 편의가 우선시될 수 없음을 아는데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요조의 에세이에서 비건 지향인의 삶에 대해 접하게 된 것이다.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에서 요조는 비건 지향인의 삶에 대해 어렵지 않은, 구체적인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채식이 재미있어 보여서 시작했다는 그녀는 자신의 생일마다 고기를 먹는 ‘치팅데이’를 갖기도 하며, 자신을 ‘고독한 채식주의자’로 명명하고 여럿이서 식사할 때는 다수의 의견을 따라 육식을 하기도 한다. 그녀는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맞춰서 커스터마이징을 하며 독창적이고 주체적인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사실 개인적으로 비건 지향을 하는 것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나의 식사가 누군가에게 필연적으로 부담을 지울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은 못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기저에 비건 지향인들을 바라보는 판관들의 눈초리를 신경 쓰는 초라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고독한 채식주의자’라니. 나 같은 겁쟁이에게 딱 맞는 방식임이 아닐 수 없었다. 혼자 있을 때만 비건 지향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도전은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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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채식주의의 단계 중에서도 유동적으로 육식을 겸하는 플렉시테리언에 해당한다. 비건 지향을 결심하는 것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요조와 마찬가지로, ‘고독한 채식주의자’ 인 셈이다. 나는 혼자 있을 때는 비건식을 고수하지만, 외부 모임이나 만남에 있어서는 육류를 겸한다. 처음에는 채식주의자의 범주 내에 속해도 되나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다만, 일주일에 3일만 비건 지향을 한다거나 매주 월요일을 비건 데이로 지정하는 등 각자의 스타일에 맞춰 비건 지향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을 바꿨다. 비건인이 아니라 비건 ‘지향’ 인이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었다. 완벽을 꿈꾸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단 미미한 실천이라도 하는 편이 동물 하나의 목숨을 살리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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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식단을 유지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지만 놀랍게도 전혀 힘들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채소들의 맛을 더욱 세심하게 느낄 수 있게 되어서 식사에 대한 만족감이 훨씬 커졌다.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비건 식당들을 퀘스트 깨듯이 한 곳 한 곳 답사하는 것도 즐거웠다. 무엇보다도 감사하게 된 것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하는 대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무언가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는 삶의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식사라도 나의 가치관과 신념에 맞춰 할 수 있다는 것은 내 삶의 주도권을 쥔 사람이 나라는 사실을 매번 상기시켜주었다.

 

하지만 고작 두 달 남짓의 시간 동안이었기에 가능했을 일이기도 했다. 이제라도 시선을 주위 동물들에게 돌릴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은 지금 얻은 귀한 초심을 혹시라도 잊게 될 수도 있다는 조바심과 늘 함께했다. 나는 발화점이 낮은 사람이라, 쉽게 불타오르지만 또 언제 꺼질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으니까. 비건 지향은 시작보다도 유지가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나 역시도 어떻게든 오래 지속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유롭게 방법을 찾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첫 번째로는 스스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는 엄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아침마다 엄마는 한 손에 수저를 들고 형형한 눈빛과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며 이렇게 외쳤다. “너, 고기를 안 먹으니까 힘이 하나도 없는 거야!” 아침에 힘이 넘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다가 등짝을 맞는 일도 이제는 지겨웠다. 그렇게 엄마를 설득하기 위해서, 그보다도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논리적 뒷받침을 하기 위해서 책들을 허겁지겁 뒤적이다 공장식 축산업의 폐해, 즉 지구상에서 자행되는 대규모 학살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공장식 축산업의 폐해



평소 잔인한 장면을 쉽게 보지 못한다. 공장식 축산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참혹한 장면들이 많을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시각적인 충격이 그나마 덜할 것 같다고 생각되는 책이라는 매체를 통해 공장식 축산업의 현실을 접해보았다. 지금부터 알게 된 정보는 모두 한승태 작가의 <고기로 태어나서>와 앞서 언급한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통해서 알게 된 내용들이다. 또 다른 매체로 동물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이나 <지구 생명체>, 영화 <옥자>를 권해본다.

 

<고기로 태어나서>의 작가 한승태는 4년 동안 닭, 돼지, 개를 키우는 사육농장에서 일하며 이 책을 썼다. 일종의 잠입 르포 형태로 구성된 책의 생생한 묘사 때문에 충격을 금치 못한 순간이 많았다. 공장식 축산업을 다룬 책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이 책의 서문이 인상적이어서 집어 들게 되었는데, 저자는 채식을 지향하자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살점으로서의 고기’를 그대로 보기를 꿈꾸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비건 지향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더라도 이 공장식 축산업의 현실을 알게 된다면, 동물 못지않게 불쌍한 것은 그런 병든 가축을 먹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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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자유 연대

 

 

닭: 가로, 세로 50x30cm, 보통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레인지만한 크기의 케이지에 평균적으로 닭 네 마리가 들어가 있다. 농구공만한 닭을 이 정도 공간 안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닭은 구기고 찌그러뜨려도 터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경미한 동작만으로도 케이지 전체가 들썩이기에 어느 순간부터 닭들은 서로를 쪼아대기 시작한다. 사진 상의 닭의 모습과 달리 케이지 안의 닭에게는 깃털이 거의 달려 있지 않고 우둘투둘한 피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고 한다. 목과 날개의 털이 빠진 이유를 그렇게 추측한다.

 

암탉은 자연 상태에선 연간 30개 정도의 알을 낳는 것이 정상이나 사육장의 암탉은 좁은 틀 안에서 연간 300개 이상의 계란을 생산한다. 이때 칼슘이 다 빠져나가 골다골증에 걸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며 산란계 수평아리들은 알을 낳지 못해 수 백 마리가 그라인더에 갈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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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복지연구소 어웨어

 

 

돼지: 모돈은 생후 210일부터 주입대를 생식기 안으로 밀어 넣으며 인공 수정 작업으로 임신했다 새끼를 낳기를 3년 내내 반복하다 도축 된다. 수컷은 마취 조차 하지 않고 손으로 고환을 잡아 뜯기며 거세를 당한다. 그러다가 실수로 힘 조절을 잘못하면 내장이 튀어나오는 일도 있다고 한다.

 

스톨 안의 돼지들 중에서는 종종 빈 사료통에 수십 분이 지나도록 머리를 들이박는 반복적인 행동을 하는 돼지들이 있는데, 이 ‘지속적이고 반복적이지만 아무 목적이 없는 행동’을 정형 행동이라고 부른다. 돼지의 IQ는 강아지보다도 높은 75~85 정도에 해당하며 지능은 3~4살 아이와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동물학자들은 이 정형 행동이 사회성이 높거나 지능이 높은 동물이 고립되거나 외부 자극이 결핍된 환경에 감금되었을 때 나타나는 정신 장애에 의한 행동 장애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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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Domain

 

 

소: 한 손은 소의 항문을 통해 직장 안으로 집어넣고, 한 손으론 성기 안으로 인공수정 관을 자궁 입구까지 억지로 밀어 넣어 소를 강제로 임신시킨다. 이때 암소가 반항하지 못하도록 거치대에 결박시키는데, 외국에서는 일부 업자들이 이 장치를 강간대(rape rack)으로 불렀다. 그렇게 송아지가 태어나면 암소는 어미의 절차를 그대로 밟고 수컷은 근육이 발달되지 못하도록 좁은 우리에 가둬 송아지 고기로 팔아 넘긴다. 어미 소에게는 매일 기계를 부착해 우유를 짜내는데 이 전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커서 원래 소의 평균 수명은 25년인 것에 비해 4-5년 만에 자기 발로 서지 못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다. 그런 소는 즉시 도살장으로 보내진다.

 

*

 

이 모든 현실을 알게 되자, 더 이상 이전처럼 고기를 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물론 친구들을 만날 때는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육식을 행하긴 하지만, 그런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조차도 비건 지향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에 드는 강력한 불쾌감과 죄책감일까 싶어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충격은 점차 옅어지고 희미해지겠지. 어쩌면 이곳에 글을 쓰는 이유는 아직도 스스로가 못 미더워 외치는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점은 나의 주변인들이 대개 다정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 친구들에게 비건 지향을 하고 있다고 우연히 밝히게 된 적이 있었는데, 먼저 비건 식당 목록을 보내주며 다음에 여기 꼭 같이 가자고 말해주는 이들이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하는 그들을 보자 내게도 용기가 생겼다. 앞으로는 주변인들에게 내게 해당되는 옵션이 있는 곳으로 함께 식사를 하러 가기를 제안해 볼 예정이다. 다만 한국의 식당 중에는 비건 지향 옵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는 유제품과 달걀까지는 섭취하는 락토-오보 베지테리언 식단으로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건을 슬쩍슬쩍 묻히고 다니는 일은 그다음부터 해볼 생각이다. 어떤 방식이 지혜로운 방식일지는 차근히 고민해 봐야 할 문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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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먹은 비건 지향식들. 두부와 버섯 등을 먹고, 가끔 콩고기를 먹는다.

면 요리를 자주 해먹는 편이다. 외부에서 식사를 할 때는 채식한끼라는 어플을 이용한다.

 

 

사실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에 성공하여 현재 집에서는 국물 요리를 할 때조차도 채수를 이용할 정도로 엄격한 비건식을 고수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한번도 어려웠던 적이 없긴 하다. 맛에 목숨 거는 내가 이렇게나 편안하게 비건 지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비건 음식이 정말로 맛있기 때문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비건 지향을 둘러싼 오해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모두 눈치챘겠지만, 나는 비건 지향을 실천하기에 앞서 일찌감치 겁부터 집어먹은 겁쟁이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할 때는 어떡하지.’, ‘단백질 보충은 어떡하지.’, ‘풀은 안 불쌍하냐는 세간의 조롱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나처럼 망설이는 사람들을 위해 김한민 작가의 <아무튼, 비건>을 참고하여 여러 오해들에 대한 간단한 답변을 모아봤다. 해당 도서에는 실전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이보다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니, 혹 비건 지향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유용한 정보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 책으로 비건 입문을 했다고 알고 있다. 내게도 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비건 입문서로 강력하게 추천한다.)

 

풀은 안 불쌍하냐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성을 가지는가, 그들이 말을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여부이다. 만약 어떤 존재가 고통을 느낀다면, 그 고통을 고려하지 않는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 J. 벤담, <도덕과 입법의 원리 서설> 중에서

 

 

비거니즘의 목표는 고통의 최소화에 있다. 식물의 경우 과학적으로 고통이라고 정의하는 것을 느낀다고 생각할 과학적 근거가 없다. 식물이 외부 자극에의해 '반응'하는 것은 동물이 뇌와 중추신경계를 통해 '고통'을 느끼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식물과 달리 동물은 쾌고감수능력이 있어서 고통을 느낀다. 비건 지향은 세상에 가득한 고통의 총량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일이다.

 

채식만 해서는 건강할 수 없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육식보다 훨씬 건강하다는 것은 인류학적으로도 , 영양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는 사실이다. 2015년 세계보건기구 WHO산하 국제암연구소(IARC)는 베이컨·햄 등 가공육을 술·담배와 같은 1군 발암물질, 소·돼지·양 등 붉은 고기를 ‘발암 유발 효과’가 있다는 2A군 발암물질로 분류했다.  육류 소비량 1위인 미국에서도 많은 의사와 영양학자들이 육류와 유제품을 지양하기를 권하고 있다. 그럼에도 널리 퍼지지 못한 이유에는 막대한 이해관계가 걸린 거대 축산/낙농 기업의 광고와 기술 등이 자리할 것이다.

 

채식의 실천 동기는 종교, 윤리, 건강, 환경 등으로 다양하다. 채식을 통해 건강을 회복하거나 개선했다는 사람들이 있기에 지속되는 실천일 것이다.

 

단백질 신화에 대해서

 

단백질 신화만큼 짧은 시간 안에 현대인들을 사로잡은 미신은 없을 것이다. 한국은 오히려 70대 이상을 제외한 전 연령에서 단백질 권고량을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단백질은 채소, 곡류를 통해 얼마든지 섭취할 수 있다. 특히 콩 종류, 대두의 경우는 육류보다 더 많은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단백질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하루에 권장하는 단백질의 양은 몸무게 1kg당 0.8g-1.0kg정도다. 50kg인 사람은 약 50g의 단백질이 필요할 뿐이다. 초당 두부 한 모(550g)를 기준으로 뒀을 때 100g 당 8.3g의 단백질이 들어있다고 한다. 언뜻 봐도 적지는 않는 숫자다. 게다가 콩을 삶으면 생콩에 비해 단백질 함량이 6∼7%, 볶으면 2∼3% 가량 증가하기도 한다. 우리 국민의 선호도가 높은 콩 중에서 단백질 함량이 높은 콩은 서리태(100g당 43.1g), 서목태(100g당 42.7g) 등이 있다.

 

육류가 지방이나 포화 지방산을 포함하기에 혈관 염증을 일으키거나 혈당을 높이는 등 다른 문제점을 가진 것에 비해 식물성 단백질은 더욱 안정성이 높다고 한다. 2011년 미국 심장 협회에서는 식물성 단백질만으로도 필수아미노산 및 비필수아미노산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누군가의 당연한 행복을 기다리며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많길

 

나를 굳이 구하러 오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당연하길

 

누군가의 당연한 행복을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

 

- 강지이, <여름 샐러드> 중에서

 

 

읽고 있던 시집에서 우연히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꼭 동물과 동물권을 지키려는 사람들과의 대화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너와 나는, 그러니까 우리들은, 당연하게 누려야 할 행복들을 ‘이상하게’ 기다리고 있다.

 

“네가 이런다고 세상이 바뀌니?” 진부하게도 엄마는 그런 말을 했다. 지금 눈앞에 닥친 할 일도 많은데 이런 것들까지 신경 쓰냐고. 물론 개인의 실천으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 담론과 정책적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 일이겠지만, 개인의 관심과 목소리 없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한 마리라도 살릴 수 있다면, 지구의 종말을 한시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런 바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동물권 운동이고 환경운동일 것이다.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온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개에게는 세상이 바뀌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비거니즘 역시 이 맥락과 함께하는 것 같아 보인다. 비건 지향을 한다고 해서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다만 몇 마리의 생명을 구할 수는 있지 않을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많길, 너를 구하러 가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당연하길. 우리들의 당연한 행복을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참고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시대의 창, 2018. 04.27

김한민, 『아무튼, 비건』, 위고, 2018.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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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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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오드리
    • 응원합니다.  저도 박세나님 글을 읽고.
      느슨한 비건지향을 시도해보려합니다.
      깊이있게 고민하고 노력하고 계신 모습이 그려집니다.
      화이팅하세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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