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방랑의 끝, 그리고 시작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2.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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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하게 웃기면서 대놓고 유쾌한 동생과 전시를 보러 갔다.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내가 동아리 면접관이고 동생이 지원자였는데, 온라인으로 진행된 면접 중에 동생 뒤를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를 가까이 보여달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고양이 때문은 아니지만 그는 합격했다. 나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애묘인들에게 나도 모르게 정이 가는 증상이 생겼다.


예술이라는 공통 관심사가 있어 만나서 뭘 해야 할 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사람을 만나는 스트레스를 줄여줄 뿐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약속 장소는 김리아갤러리. 김정아 작가의 개인전 《ylang ylang 일랑일랑》이 열리고 있다. 지난 2월 17일에 시작해서 오는 3월 19일까지 열리니까 정확히 30일 동안 진행된다.


작가는 작업 매체와 주제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작품을 정해진 틀에 담아 ‘이것이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이 매력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작업장을 서울에서 양평으로 옮기고 나서 처음 그린 그림들로, 다양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추상이 주를 이룬다. 이에 전시 제목처럼 부드러운 곡선이 많고 운율감이 느껴지는 ‘일랑일랑’이라는 글자와 소리는 전시된 작품의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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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랑자(oar)

 

 

작품마다 별다른 캡션이 없어 제목과 작품을 대비시켜가며 봤다. 겹치는 제목이 많았다. 제목이 같은 작품들은 공통점이 있어 나중에는 작품만 봐도 제목을 알 수 있었다. 모두 42개의 작품 가운데 <방랑자>라는 작품으로 전시가 시작됐다. <방랑자>는 총 10점인데 공통적으로 서커스단 같은 화려한 복장을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그렸다.


같은 제목을 가진 다른 작품들은 끼리끼리 모여있는 데 반해 <방랑자>는 군데군데 흩어져 있었다. 역시 방랑은 혼자 하는 건가 생각했다. 그러다 전시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38. 방랑자(at door), 40. 방랑자(indoor). 그림 속 방랑자가 문을 넘어 목적지에 들어가면서 방랑자 연작은 마무리된다. 방랑의 끝을 보자 그제서야 나도 전시의 시작부터 작품과 함께 방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방랑자와 동행했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다. 작품의 배치와 동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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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방랑자(at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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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방랑자(indoor)


 

방랑의 사전적 의미는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이다. 한자로 써 놓으면 놓을 방(放), 물결 랑(浪) 즉, 물결에 몸을 맡기듯 자유롭게 놓아준다는 뜻이다. 단어가 막막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유로운 뉘앙스가 더 강하다.


방랑의 마무리를 보고서야 전시 내내 방랑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방랑 중일까? 방랑하기 위해 휴학을 선택했다. 그리고 다음 주면 다시 학교에 간다. 내가 선택한 방랑이 정말 끝나가고 있다. 단어 뜻 그대로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닌 1년이었다. 그 동안의 생활을 파격적으로 ‘새로 고침’하고 싶었다. 그래서 첫째로 환경을 바꿨다. 지독한 집순이라서 일부러라도 약속을 만들고 밖에서 해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 결과 지금은 외출하는 날보다 집에 있는 날을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생활이 바뀌었다. 계속 같은 환경에 있다 보면 환경과 자신이 일치되어 감흥이 무뎌진다. 더 이상 놀라울 것도, 대수롭게 여길 것도 없어진다.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지면 그간 무딘 시선으로 바라본 모든 것들이 비로소 새롭게 느껴진다. 이 느낌은 앞으로의 삶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할지 계속해서 생각하게 만든다.


삶 ‘새로 고침’ 두 번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소수의 친구들과 깊은 관계 맺는 것을 좋아해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에는 흥미도, 그럴 에너지도 없었다. 그러다 휴학으로 시간적, 그리고 심적 여유가 생기니 만나자는 사람은 안 가리고 다 만났다. 이제는 약속을 위해 없는 시간도 쪼갤 정도다.


완전히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공감능력이 더 좋아졌다. 관심도 없던 와인을 즐기게 됐다. 맛있는 커피를 찾으러 동네마다 돌다가 인생 도넛을 발견하기도 했다. 더울 땐 에일 맥주를 찾게 되고 별안간 당일치기 기차 여행을 떠난 적도 있다. 허세 없이 전시 보는 법도 배웠다. 새로운 패션 브랜드와 음악을 알게 됐고, 이러한 것들이 모이자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랑의 시간은 결국 ‘나’를 체험하게 한다. 새로운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 내 취향과 가치관을 깨닫는다. ‘collect myself’라는 표현이 있다. ‘마음을 추스르다, 진정하다’ 쯤으로 번역되는데 collect라는 단어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나를 주섬주섬 모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동안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생각과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방랑이었다. ‘방랑의 끝을 어떻게 알지?’ 했는데 방랑의 시작을 떠올릴 때가 그 여정을 마무리해도 된다는 뜻 같다. 방랑이 끝나간다. 새로운 방랑이 기대된다.

 

 

[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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