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우리가 도착하는 곳 (미술/전시)

출발, 도착, 그 이후
글 입력 2022.02.16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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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다음 달이면 끝이 나는 전시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 제목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 4.4>로,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2021년 10월 15일부터 오는 3월 27일까지 진행중이다.

 

전시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당신은 지금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물론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답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될 수 있는 답이 많다는 의미기도 하다. 흔히들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행복이라 말할까. 누구는 돈, 누구는 명예? 아니면 더 구체적으로 각자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말할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전시는 내가 작품들을 감상하는 내내, 내게 이런 질문을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전시를 보는 동안 느낀 점을 바탕으로, 내가 내린 나의 답과 함께 전시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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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에서 죽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전시를 준비하다 죽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주 먼 나라에 있을 것 같군요. 울란바토르에서 회고전을 진행한다거나요. 늙은 광대처럼, 언제나 여행하다 길 위에서 죽는 거예요.” - 2015년 히로시 스기모토와의 대화 중에서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199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이후 국내 최대 회고전이자, 작가의 첫 유고전이기도 하다.

 

전시의 제목 '4.4'는 작가가 직접 선택한 타이틀이며, 그가 태어난 1944년도를 의미한다. 하지만 꼭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에서의 숫자 4가 “死(죽을 사)”와 발음이 같아 죽음을 상징하는 숫자라는 것에 흥미롭다고 말했다 한다. 왜냐면 그는 전시 준비 동안 자기 삶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인생의 4단계(생로병사, 生老病死) 중 ‘마지막 생의 단계’라고 말했다 한다. 또한, 4라는 숫자 다음에 표기된 마침표는 인생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기표를 의미한다고 한다. 볼탕스키는 전시 디자인을 모두 마친 후 7월 15일, 76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볼탕스키가 지금까지 탐구해온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관객들에게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는 전시라 할 수 있다.

 

그는 흔히 ‘쇼아(Shoah)’ 작가라고 알려져 있다. 예술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꺼내는 것은 언제나 불편한 일이지만, 그는 그 불편한 진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섰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죽음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가 태어난 1944년, 유대인에게 가해지는 냉혹한 현실을 생각해 보면 왜 그토록 그가 죽음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하다.

 

 

 

출발(Départ)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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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죽음에 대한 개념을 보다 구체화한 작품인 기념비 시리즈는 볼탕스키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어린이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시리즈의 주제는 '어린 시절의 죽음'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어린이는 죽을 수밖에 없다. 수집된 사진을 재촬영하여 가공한 인물들은 작은 백열등과 주석 액자 틀에 담겨 새롭게 배열되고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었던 작품은 바로 이 기념비였다. 나는 솔직하게 작품을 보고 소름이 돋았었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사진을 둘러싸고 있는 저 전등은 너무나도 환했으며, 몽환적이다. 그리고 나는 전등 사이로 보이는 사진 속 인물들에게서 뭔가 '그립다'라는 감정을 느꼈다. 사진이 그리 선명한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러한 점이 마치 시간이 지나면 까먹어버리듯, 시간이 지나면 사진 속 형상이 아예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핥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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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에 제작된 <핥는 남자>는 커다란 여자 인형을 한 남자가 핥고 있는 영상 작품이다. 볼탕스키는 자신의 형에게 오랫동안 혀에 상처가 날 정도로 인형을 핥았던 이유를 질문한다.

 

분명 영상 속에서 남자에게 핥아지고 있는 것은 인형인데, 나는 그 인형의 표정에서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남자가 점점 더 가까이, 더 과도한 행위를 하면 할수록, 여자 인형의 표정 또한 점점 더 일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여자의 심리와 일방적으로 오로지 자신의 무언가에만 집중하는 남자의 심리가 나는 이해가 되면서 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령의 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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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9년 일본 도쿄미술관 전시에 처음 출품된 작품이다. 10m의 복도에 양옆으로 커튼이 쳐 있는데, 이 통로를 지나는 관객은 거대한 그림자 모양의 형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관객을 영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커튼이 바람 때문에 약하게 흔들리면서 커튼에 비치는 그림자들도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그래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았고, 걸어가는 동안 나는 저 복도 끝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다. 만약 죽어서 다른 세계로 걸어간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느 누가 빨리 가라 재촉하지도 방해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저 너머엔 어떤 곳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하며 제 발로 천천히 복도를 걸어 나간다.

 

 

   

도착(Arrivée)


 

<황금 바다>

 

이 작품은 2017년에 제작된 설치 작품이며, 밖에서 안을 바라보게 방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바닥에는 70cm가량의 지푸라기가 쌓여있고, 금박의 천은 응급 담요다. 전등과 헝클어진 담요는 폭풍 치는 바다를 떠오르게 한다.

 

이 세계에서 우리는 황금을 귀한 것이라 여긴다.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만을 떠올려 봐도, 거기엔 항상 황금은 세상 만물 제일로 그려져 있었다. 유령들이 맞이하는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이 바로 이 황금 바다였는데, 위에 달린 전등이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황금 바다는 출렁이며 움직이는 듯 보였다. 나는 그렇게 멍하니 쳐다보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바다를 들여다보았는데, 그것은 그냥 반짝이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예뻐 보이지도, 행복한 감정이 들지도 않았다. 만약 우리가 죽고 나서 이와 같은 황금 더미를 만난다면 살아생전만큼이나 행복할까? 죽고 나면 이 덩어리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데 말이다.

 

   

<아니미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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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러닝타임이 13시간이 되는 영상 작품이다. 화면에서 나타나는 풍경은 평균 해발 2,000m로,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인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이다. 아타카마는 별자리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수백 개의 방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볼탕스키가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별자리에 맞춰 배치하였다고 한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독재하에 살해된 수천 명의 정치범이 이곳에 묻혔고, 많은 사람의 유해가 오늘날까지 행방불명 상태라 한다. 작품 제목 <아니미타스>는 스페인어로 "작은 영혼"을 의미하지만, 칠레에서는 사막고속도로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헌정된 이름으로 불린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방울 소리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이 작품은 피노체트 정권의 억압에 시달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방울 소리는 망자들의 혼을 치유한다고 한다. 정말 방울 소리가 혼을 울리는 것일까. 나는 반복되는 벨 소리가 전혀 시끄럽지도 거슬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방울 소리에 나는 홀린 듯 비디오 앞에 앉아 영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건조해 보이는 땅에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막대는 마치 줄기 같았고, 그 위에 달린 방울은 예쁜 소리를 내는 꽃과 같았다.

 

   

<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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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를 위해 부산에서 재제작 된 이 작품은 700kg가량의 검은 옷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누군가의 소유물이었을 옷들은 여기서는 개성도, 추억도 사라지고, 형태조차 구분조차 할 수 없다. 죽음을 암시하는 거대한 설치 작품은 그 자체로 죽음에 대한 메타포이다.

 

나는 커다랗고 시커먼 이 작품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작품 그 자체로 죽음을 상징한다는데, 동양에서는 사람이 죽고 나면 화장을 하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죽어서 가루가 되어버린 사람의 모습, 그래서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작품 말고도 <저장소 : 카나다>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것 또한 수많은 옷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가가 이러한 오브제를 자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옷을 입는 사람이 죽고 나면 옷만 덩그러니 남겨진다는 것에서 '죽음'을 본 것이 아닐까. 볼탕스키는 "사진과 옷의 공통점은 현존인 동시에 부재를 의미한다. 둘은 객체이자 주체에 대한 추억의 유품 또는 기억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고 한다.

   

 

 

그 후(Après)


 

<잠재의식>

 

[꾸미기][포맷변환][크기변환]9. 잠재의식 Large2.jpg

사진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십자 모양으로 배열된 4개의 스크린에는 더없이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져 있다. 초원의 사슴, 일몰, 눈 덮인 숲, 새떼의 영상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20세기 잔혹 행위에 대해 영상이 숨어 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장면은 20세기 잔혹 행위에 대한 잠재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의 펜데믹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염병 기간 동안 많은 국가에서 일반적인 애도 의식이나 장례식이 금지되었고, 많은 사람이 영상 통화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볼탕스키는 코로나라는 전염병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지만, 그것을 자신의 물질적 어휘와 역사적인 트라우마와 연결하는 접근을 보여주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는 스크린에 집중하다 정말 순간적으로 다른 이미지들이 오버랩 되어 보여지는데, 나는 그 이미지들이 20세기의 아픈 기억인 베트남 전쟁과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진이라는 것을 이후에 알았다. 가끔 멋진 풍경을 보고 있으면 현재의 일들은 잠시 잊고, 혼자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죽어서는 돌아가 현실이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울까. 근데 또 내 영혼이 그렇게 자유로이 자연을 떠돌고 있을 때 살아생전에 가지고 있던 기억들이 드문드문 떠오르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나 죽고 나서 그게 나를 괴롭히지는 않을까?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살아있을 때 정말 행복했다거나, 정말 잊고 싶었던 기억일 것이다.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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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165개의 전구는 매일 하나씩 꺼지게 설정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주 밝게 시작되어 마지막에는 완전히 암전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지나가는 시간과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작가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시간에 대한 탐험과 동시에 존재가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이야기한다.

 

내가 관람한 날짜는 2월 13일로, 165일 동안의 전시 기간이 이제 한 달 좀 넘게 남았을 때였다. 그래서 보이는 작품의 사진과는 다르게 아주 어두웠다. 이 <황혼>이라는 작품에서의 전구는 시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만, 작가가 계속해서 사용한 전구의 진정한 의미는 사람의 의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3층에서 본 <심장>이라는 작품은 볼탕스키의 심장박동 소리와 함께 오로지 한 개의 전구가 깜빡이는 작품이었다. 인간의 생명을 상징하는 심장,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전구를 보면서 나는 언젠가 저 전구가 뚝 하고 나갈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수많은 전구가 꺼지고 있다. 나는 이 작품의 모든 불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이 궁금해졌다. 모든 불이 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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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부산시립미술관

 

 

하얀 천들이 겹겹이 뒤엉킨 채 바닥에 산처럼 쌓여있다. 생체 신호를 상징하는 천장의 LED 조명과 병상의 침대 시트를 연상하게 되는 흰색 천 무덤은 전 세계를 팬데믹으로 빠져들게 한 코로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팬데믹 이후 죽음은 더 이상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설치 작품이다.

 

나는 전시의 흐름을 보면 <탐광>과 대비되는 작이라 생각했다. 전 작품과 달리 밝은 분위기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여기서도 작가는 코로나로 인한 '죽음'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었다. 병상의 침대 시트를 떠올리며 만든 무덤 모양의 작품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정말 죽음이 가까이에 있다고 느끼고 있는 요즘, '삶과 죽음'에 관해 묻는 볼탕스키의 전시는 시대적으로도 정말 의의가 있는 것 같다.

   

* 실제 전시의 작품으로 '출발', '도착', 그리고 'Après(그 이후)'가 등장한다. 인생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이후의 의미를 담고 있는 텍스트로, 볼탕스키의 철학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키워드이다. 하지만 작품 설명에도 나와 있듯 이러한 텍스트는 섹션을 구분하는 단어라기보다는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그가 생전에 관객에게 던졌던 질문인 “삶과 죽음”에 대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본 내용에서 섹션마다의 작품 구분은 온전히 글쓴이 나름의 분류와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린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 걸까"


 

처음에 한 "당신은 지금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목표를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더 넓게, 나는 우리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의도를 반영해, "우린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라고 다시 한번 묻고 싶다.

 

아까도 말했듯, 이 질문은 답이 없는 질문이지만, 인간이라면 한번은 생각해볼 문제이며 특히 전 세계가 팬데믹에 빠져있는 지금, 이러한 질문은 더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할 것이며 분명 많은 의미를 가져다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전시를 보는 내내 받았던 이 질문에 내린 나의 답은, 역시 바로 '죽음'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이 지금처럼 나아가 비로소 도착하는 곳은 바로 '죽음'이라 말해주고 싶다.

 

약간씩 그 길이 다를지라도 우리는 모두 한곳에서 만나며, 그리고 그곳에는 죽음이 있다고. 그리고 복도 저 너머에는 내가 이루지 못했던 것도, 내가 그토록 원하던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것이라고. 

 

위로가 되길 바라며,

 

죽음은 무엇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는 그렇게 모두 마침표를 찍는다.

 

 

[김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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