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따 박성빈] 자존감 수업은 전부 꺼지라고 해

글 입력 2022.01.0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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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고 싶다고 쓴 적 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 뒤틀려서였다. 내가 뒤틀린 까닭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다. 말하자면, 자존감이 낮아서라고 여겼다. ‘자존감이 낮아서.’라는 문장이 나를 정의했다. 내가 눈치를 보고, 예민하게 구는 건 ‘자존감이 낮아서’였다. 그 문장이 나를 설명했다.

 

높은 자존감의 개인이 되려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해야 했다. ‘자존감이 없는 나’를 긍정하고, 그래도 괜찮다는 식으로 자신을 위로하면 자존감이 높아진다고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그래서 말하고 다녔다. 저는 자존감이 부족해요. 자판기처럼 튀어나왔다.

 

그 날도 그랬다. 내가 적극적인 성격이 못된 건 자존감이 낮아서에요. 대충 그런 맥락의 대화가 이어졌다. 성호르몬은 자존감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글쎄요.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지 않을까요.

 

자존감이 낮다, 란 식으로 자신에게 변명하는 사람을 많이 봤어요. 실패나 게으름 혹은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걸 자존감이 낮다로 눙쳐요. 자존감을 자기 위안의 도구로 삼아요. 성빈님이 그렇다는 말은 아니에요. 저는 성빈님을 아직 잘 모르니까.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는 나도 몰라요. 다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단어는 모든 현상이나 설명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여요.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자존감이란 잣대로 진단하면 답은 두 개밖에 안나와요. 자존감이 높아서 혹은 낮아서. 이게 상식적인가요? 사람의 마음은 다양하고, 무궁무진하고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데 자존감의 높낮이로 사람의 모양이 재단되잖아요.

 

그리고 대체 자존감이 무슨 뜻인가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아끼는 마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 마음? 그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모든 잣대가 자신을 향해 있는 거네요. 그게 좋은 건가요?

 

뭐라는 거야. 아직 성호르몬과 친하지 않았을 때였다. 내가 자존감이란 단어를 무슨 맥락에서 쓰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느끼면서도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벌개졌던 거 같은데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나조차 모르는 내 마음이 타인에게 간파당하면 부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건 간파한 이의 통찰이 정확하다는 뜻이다. 그는 내가 흠결을 변명하고 싶은 마음으로 ‘자존감이 낮다’고 들먹이는 걸 알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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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자존감은 ‘-해도 괜찮아’라는 문법의 언어다. 성호르몬의 말이 맞다. 그 말은 변명이다. 괜찮다는 말을 하기 위해선 무작정 나를 긍정해야 한다. 내 결함과 뒤틀린 자아 모두 긍정해야 한다. 그것은 쉽게 자기만족과 자기위로를 불러일으킨다. 쉽게 만족하고 위로받는 개인은 성찰할 수 없다. 무엇이든 괜찮다는 삶의 태도에 자기 객관화가 있을 리 없다.

 

자존감을 채우기 위해 ‘타인’이 동원된다.

 

그 이후에 스스로 자존감이 높다고 말하는 인간을 몇 봤다. 자존감이 높다면서 자기자랑을 늘어놨다. 자기 업적이나 성취를 나열하는 것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다. 자존감이 높으면 겸손함을 부리지 않는 걸까. 자존감이 높으면 자기 자랑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지는 걸까. 자존감은 그럼 성취가 부족한 인간에겐 적용될 수 없는 걸까. 자존감은 성취를 가름하는 척도인 걸까.

 

애당초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자존감이 성립할 수 없는 곳에서 살고 있다. 어떤 공간에 속했냐에 따라 평가하고 평가받는 사회다. 그 공간 내부에서도 자신의 서열을 가늠하는 시대다. 비교대상이 끊임없이 생겨난다. 취업자와 비취업자가, 취업자라면 어느 곳에 취업했는지에 따라, 같은 곳이면 어떤 커리어를 이끌었는지 끊임없이 비교하고 박탈감을 느낀다.

 

그럼 이 악물고 자기를 증명하려는 인간이 이렇게 많은 까닭도 보인다. 자존감이 높다고 말하는 인간의 태반이 스스로를 수식하는 언어에 능하고, 그건 자기 증명의 욕망이다. 증명의 욕망은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으로 또 다시 이어진다. 차라리 인정하는 게 낫다. 나를 증명하고 싶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다는 언어가 훨씬 솔직하다.

 

우리는 성인이 되기 직전부터 점수표대로 사람이 줄 서 있는 대열을 봤다. 수능 소수점 세자리까지 따지고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 내부에서도 수시와 정시로 들어온 학생의 위계가 갈린다. 남보다 더 좋은 간판의 학력을 얻으려 1년을 골방에서 썩는다. 작은 입자까지 따져서 자신과 타인의 위치를 재야 직성이 풀리는 환경에서 우월감과 열등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높다고 하는 자존감의 이면은 우월감이다. 그리고 우월감은 타인에 대한 대상화를 연료로 삼는다.

 

나 역시 그런 방식으로 ‘자존감’을 채웠다. 연락도 안 닿던 이들의 근황을 묻고 다닌 때가 있다.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으로 호구조사를 했다.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낼까?,하고 궁금해 하는 마음의 이면에는 내 상황과 비슷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깔렸다. 나와 별다를 게 없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면 안도했다. 나는 아직 괜찮구나, 자기위안을 얻었다. 자기계발에 매진해서 성취를 일군 친구를 보면 배알이 뒤틀렸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하고 자존감을 채우려면 내 삶을 타인과 비교해야 했다. 자존감이란 게 그런 거였다. 그러니까, 타인의 근황을 묻던 내 자아는 허망할정도로 약한 거였다.

 

자존감이란 단어로 현상이나 감정을 설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열등감이나 박탈감이라는 적나라한 언어로 대치됐으면 좋겠다. 열등감이나 박탈감은 한시적 감정을 수식하는 낱말이지만 자존감은 개인의 궤적 전부를 뭉뚱그리는 단어로 쓰인다. 내 열등감을 고백했더니, 열등감의 원인이 자존감이 약해서 라고 말하던 이에게 일갈하고 싶어 이 글을 썼다. 이건 내 장황한 반박이다. 나는 자존감이 약한 게 아니라 그냥 열등감을 느낀 것뿐이야. 자존감 수업은 전부 꺼지라고 해.

 

 


 

 

오른발 왼발 내 고장난 걸음걸이는 누구보다 빨라.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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