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게르니카의 황소', 꿈에서 마주친 진실 [도서]

뉴욕 화단을 휩쓴 신인 화가의 비밀
글 입력 2021.12.2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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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해지기 싫다는 이유로 예술가가 되려는 것과는 반대로, 나는 평범해지고 싶어 예술가의 길을 택한 셈이다. 예술가와 광기는 요리사와 칼만큼이나 진부하기 짝이 없는 조합이니 말이다.”

 

<게르니카의 황소>, p.15

 

 

광기는 비이성의 세계를 엿보는 열쇠다. 이것이 예술가에게는 영감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한이리의 장편소설, <게르니카의 황소> 속 주인공 케이트 번햄에게도 그렇다. 한국 가정에서 태어나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친어머니로부터 살해당할 뻔한 어릴 적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고 얻게 된 측두엽뇌전증 질환, 쉽게 말해 환영을 보는 증상이 그녀를 예술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케이트가 처음으로 환영을 본 것은 어릴 적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통해서였다. 그림을 보고 한눈에 매료된 케이트는 열두 살 생일선물로 그 모조품을 방에 걸게 된다. 그림 속 황소는 꿈틀거리며 살아나 밤마다 케이트에게 달려들었고 그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며, 그것이 곧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17살이 지나자 더 이상 황소는 찾아오지 않는다. <게르니카> 속 황소가 가져다준 마법을 다시 느끼기 위해 케이트는 광적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어떤 그림도 같은 체험을 일으키지 못한다. 결국 케이트는 정신병원의 원장인 양아버지가 처방해 준 약을 몰래 중단해 그 감각을 되찾는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면 그 감각이 꿈속에서만 발휘된다는 점이다.


무아지경에 빠져 캔버스 위에 흩뿌렸던 물감의 흔적들이, 꿈에서 깨어나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케이트는 현실의 삶은 제쳐두고 필사적으로 꿈속의 기억을 가져오려고 노력한다. 그러던 중, 꿈속에서 케이트는 자신이 미술 교사로 근무하는 아버지의 정신병원의 한 비밀병실에서 에린이라는 환자가 자신이 그렇게 찾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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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트는 꿈속임에도 불구하고 에린의 그림을 가지고 병실을 빠져나와 작업실로 향할 계획을 세운다. 그 조건으로 에린을 정신병원에서 탈출시키고 교외의 별장에서 함께 머물면서 계속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렇게 케이트는 에린의 그림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이 상황이 꿈인지 현실인지, 현실이 맞다면 꿈속에서 본 에린의 그림을 현실로 옮겨놓은 데 성공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에린이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 맞는지조차 점점 흐려진다. 꿈에서도 현실 못지않은, 심지어는 현실보다 더 생생한 동물적 감각이 살아나는 케이트에게 꿈과 현실을 분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렇게 달콤한 성공 속에서 케이트는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에 미련을 버린다. 별장이라는 새로운 감옥에 갇혀 끝도 없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느낀 에린이 간병인이자 가정부로 고용된 수잔을 살해한 뒤 탈주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것이 현실일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케이트는 그녀의 행방을 찾아 헤매고, 마침내 마주친 에린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든 충격적인 진실을 듣게 된다.


*


책 표지를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이 쉴 틈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손놀림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든 책을 읽기 시작하면 케이트와 함께 꿈과 현실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서 떠돌게 될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이자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서술이 케이트의 일기장의 시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엇 하나 확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에린을 정신병원에서 탈출시킨 뒤 별장에 가둘 계획을 세우던 중, 케이트는 이제 자신이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도 않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되뇌인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버리는 것. 꿈과 현실이 결국엔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 내가 지금 마시고 있는 이 미지근한 커피처럼, 커피와 크림이 뒤섞여 결코 분리할 수 없게 되어버린 이 연갈색 액체처럼, 꿈이면서 동시에 현실인 그런 새로운 현실을 내가 앞으로 살아가게 될 거라는 것.”


“그래. 이 말을 앞으로는 수시로 되뇌는 것이다. 꿈과 현실이 혼동될 때마다 주문처럼 외는 것이다. 상관없어, 이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모든 게 결국 다 내 뜻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게르니카의 황소>, pp.148-149

 


이야기의 주도권이 전적으로 케이트의 심리 상태에 달려 있기 때문에 독자의 섣부른 추측은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굵직한 사건들에 주인공의 고뇌와 내적 갈등이 더해져 우리에게 더 큰 혼란을 준다. 숨가쁘게 주인공의 일기를 뒤쫓다 보면, 어느덧 케이트를 지켜보는 제3자가 아닌 케이트 본인이 된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소설의 출발이 되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 역시 백미다. 특히나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 황소는 이야기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오브제와 형상으로 등장하는데, 그 질감이나 형태 그리고 냄새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 생동감을 더한다. 그 섬세한 표현력은 주인공이 겪는 환각이나 혼란을 묘사할 때도 빛을 발한다.

 

 

"외눈박이처럼 두 뿔 사이에 달려 있는 눈 하나가 나를 보고 있었고, 다른 눈 하나는 왼뺨에서 흘러내려 그 아래 목 잘린 남자의 입속에 들어가 으깨질 것만 같았다. 일그러진 두 눈알이 나를 응시하며 한 번, 두 번, 세 번 깜빡였다. 핏발 선 눈알들이 번쩍 뜨이는 동시에 황소가 벼락처럼 뛰쳐나와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두 뿔로 내 몸속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게르니카의 황소>, p.13

 

 

**

 

되도록 이 책을 두 번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의 매력으로 치밀하게 배치된 복선과 은유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공 케이트의 일그러진 기억과 환각, 그것이 가져다준 역설적인 성공, 그러나 행복할 수 없는 그 삶 기저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었는지를 알고 난 뒤 다시 책의 첫머리로 돌아가 보자. 별 생각 없이 지나쳤던 사소한 단어, 인물, 문장에 숨겨져 있었던 의미를 파악하면 비로소 폭력으로 얼룩졌던 케이트의 내면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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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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