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건져내기’ 작업이 필요할 때 [전시]

일민미술관, 《IMA Picks 2021》, 2021.11.19.~2022.2.6
글 입력 2021.12.25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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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우물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가장 무거운 짐들부터 아래로 떨어뜨려야 한다. 즉 버려야 할 덩어리들을 마주하고, 건져내야 할 것과 작별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필자는 일민미술관의 《IMA Picks 2021》 전시를 통해 위 무거운 덩어리들을 마주하고, 마치 깊은 우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전시는 3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내외 예술 현장에서 지금 주목할만한 세 명의 작가의 개인전을 선보인다.

 

 

 

이은새, 《디어 마이 헤잍-엔젤-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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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민미술관

 

 

먼저 1층에서는 이은새 작가의 《디어 마이 헤잍-엔젤-갓》이다.

 

그는 PET 필름, 쇠 평면과 같은 이질적인 재료를 캔버스에 견주어 활용한다. 전시장 안에 놓인 거대한 쇠 평면들은 가장 무거운 감정의 파편처럼 느껴졌다. 달콤한 크림으로 뒤덮인 케이크여도 그 단면은 썩은 것처럼, 얇은 옆면에만 색이 칠해진 거대한 쇳조각들은 곪아버린 우울의 덩어리 같았다.


이 쇠 평면들 주위로 전시된 평면 회화 작업 역시 혼란스러운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회한의 옆통수>는 뇌 속에서 지속적으로 끊기지 않는 후회를 가시화하였고, <과부하의 밤>은 물감을 이리저리 흩뿌려서 정돈되지 못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표현한 것은 예술가의 시대 읽기 중 하나이다. 우리를 둘러싼 불안과 걱정, 혼란스러운 감정은 개인 내부에서만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나 인간관계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최근 ‘우울’이라는 깊은 우물에 잠시 들어가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우울을 인지할수록 더 깊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어떻게 그 우물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은 수영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힘을 빼는 것이다.


즉 깊은 우물에 잠식되지 않고 나올 방법은 손에 꼭 쥐고 있는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와 아픔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계속해서 쥐고 있다면 우물에서 결코 나올 수 없다. 이은새 작가의 작품은 이 회한의 덩어리들을 발견하고 전시장에 꺼내 놓은 듯하다. 도록에서도 “예술 작품은 작가의 고유한 미감과 감성, 개인사로 인한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사회ㆍ정치적인, 한편으론 지정학적이거나 기술적인 배경을 반영하는 공통의 경험체다.”라고 밝히고 있다.

 

 

 

홍승혜 《무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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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민미술관

 

 

한편 2층으로 이어지는 홍승혜의 《무대에 관하여》는 본질을 충실히 보여준다. <파란 무대>, <노란 무대> 앞에서 그저 기본 문자 도형의 여성과 남성이 위치한다. 2차원의 선이라는 뼈대를 불러와 3차원으로 구현시켰고, 극도의 간결함을 드러냈다.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본질을 표현하려던 말레비치와 닮아있다.


사실 인간의 삶이라는 무대에서는 복잡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경제적 양극화, 혐오, 집단 갈등 문제처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털실과 같은 존재가 굴러다닌다. 전시장의 음악은 불안함을 조성하며, <드라마 키즈>는 보여주기에 그치는 경직된 인물과 삶을 비춘다.


이러한 복잡한 사회와 대조된 홍승혜의 작업은 가장 단순한 본질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물론 모든 사람을 단순히 픽토그램처럼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인간의 바탕이 되는 태도와 사고 등 가장 기본 뼈대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작품의 빈 뼈대를 들여다보며 나의 나머지는 무엇인지와 관해 사유로 채우기도, 반대로 내가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윤석남 《소리 없이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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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민미술관

 

 

3층에서 열리는 세 번째 전시는 윤석남의 《소리 없이 외치다》이다.

 

이 전시는 미공개 드로잉과 자화상, 나무 틀을 이용한 작품까지 선보인다. 1층과 2층이 우물의 상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흐름을 준다면, 윤석남 작가는 우물에서 나와 지나간 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의 삶을 끌어낸다. 여성 초상화 또한 많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며 자화상과 함께 <고카츠 레이코 초상>, <김혜신 초상> 등을 보여주었다.


위 개인전의 제목인 <소리 없이 외치다> 작품은 나무 틀 위에 제작되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여성, 머리에 무언갈 이고 가는 여성들 사이에 활짝 웃는 여성은 없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위대한 존재였지만 동시에 여성 개인의 삶이 사라져야 그 소임을 다한 것이라 여겨졌기에, 개인 고유의 행복은 당시 여성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에서 여성들은 늘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음을 위 작품을 통해 드러낸다.


*


이렇게 세 명의 작가들은 ‘건져내기’ 작업을 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은새 작가는 자신의 무거운 돌덩어리들을 바라보고, 홍승혜 작가는 가장 기본적인 도형을 남기며 본질을 찾았다. 그리고 윤석남 작가는 무섭고 냉담했던 시기, 소외된 여성의 이름들과 외침들을 깊은 우물에서 다시 건져내며 그 존재들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우물에서 당신을 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올해의 끝자락인 지금, 스스로 잡고 있던 무거운 짐과 작별할 때일지도 모른다.


 

《IMA Picks 2021》 전시 도록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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