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새로운 질서라는 거짓말 - 뉴 오더

'이게 너희가 외면하고 싶던 진짜 현실이야'
글 입력 2021.11.1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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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202X 가상의 미래, 불안함이 들끓는 멕시코.

마리안과 가족들이 고급 저택에서 호화로운 결혼 파티를 즐기고 있는 와중,

사회 전역에서는 심각한 수준의 폭력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대가 침입하면서 저택은 아수라장이 되고

아픈 유모를 돕기 위해 집을 나선 마리안은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재앙 그 이후, 새로운 질서를 마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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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미래의 멕시코. 나체의 여인과 끝없이 쌓인 시체들, 곳곳에 묻은 초록색 페인트와 아비규환이 된 공립 병원의 모습이 보인다. 혼란으로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 호화로운 한 저택에서는 결혼 파티가 한창이다.

 

신부인 마리안은 집안 친척과 손님들을 맞이하기 바쁘다. 고급 승용차가 줄지어 저택 앞에 멈추고 화려한 복장을 한 사람들은 파티를 즐긴다. 축하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파티 분위기에 영화 초반의 끔찍한 광경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한 손님이 목에 묻은 초록색 페인트를 닦아내고, 마리안의 어머니가 세면대에서 실제일지 환영일지 모를 초록색 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이 모든 게 같은 시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인식하게 된다.

 

즐거운 파티 도중 남루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저택을 찾아온다. 마리안의 저택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하인 롤란도다. 병상에 있는 아내의 수술비를 부탁하러 찾아온 것이다. 마리안의 가족들은 그에게 몇 푼 쥐어준 뒤 빨리 떠나라 한다. 오직 마리안만이 그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결국 마리안은 결혼 파티의 주인공임에도 아랑곳 않고 하인인 크리스티안과 함께 롤란도의 집으로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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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이 자리를 뜬 사이 상황은 급변한다. 도시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는 마리안의 저택 안까지 침투한다. 시위대는 저택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저택 안의 원주민 하인들은 시위대와 한편이 되어 파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상류층은 돈과 금품을 내놓으며 하인들과 시위대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한다. 그렇게 그들의 상하관계는 단숨에 뒤집히고 영화의 제목인 뉴 오더,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 것처럼 보인다.


마리안은 롤란도의 집 안에 갇히고 얼마 뒤 고문실로 끌려간다. 곧이어 강압적인 군부의 폭력과 고문, 성적 학대에 시달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고문실에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여성, 외국인 등 사회적 소수자도 있다. 계층의 전복으로 자리잡은 줄 알았던 새로운 질서는 군부와 민간인, 즉 반민주적 질서로 다시 뒤집힌다.

 

군부는 협박과 위협으로 인질의 몸값을 뜯어내고 마리안 역시 인질이 되어 가족에게 연락한다. 하인 크리스티안과 그의 어머니 마르타는 마리안의 가족과 군부 사이에서 마리안을 구하려 위험을 무릅쓰고 몸값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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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값을 전달했음에도 마리안은 풀려나지 못하자 마리안의 가족은 크리스티안과 마르타를 납치범으로 의심한다. 결국 마리안의 가족은 고위 간부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모든 혼란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압된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고위 간부가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마리안은 크리스티안에 의해 살해된 것처럼 위장되고 크리스티안, 모든 인질과 군부는 살해된다. 그리고 고위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마르타를 비롯한 원주민들이 교수형 당한다. 그들이 시위대에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오직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볼 수 있다.”


 

이 문장을 끝으로 크레딧이 올라갔다. 이 문장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살아있는 한 전쟁은 계속된다는 것. 불의에 저항하는 움직임은 뉴 오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부패는 재생산되며 폭력과 희생은 필연적이다. 영화가 결국 고위 간부라는 또 다른 지배층이 세운 질서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에서 말하는 '새로운 질서'는 이름 뿐이었다.

 

허망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지난 몇 년간 Black Lives Matter, Stop Asian Hate, 프랑스 노란 조끼 운동, 칠레 반정부 시위, 홍콩 민주화 운동 등이 일어났지만 불평등과 갈등이 해갈되기는커녕 비슷한 문제가 다른 이름을 하고 전 세계에서 계속되고 있다. 6년 전부터 영화 구상을 시작한 미셸 프랑코 감독은 이렇게 전세계적으로 극심해지는 갈등과 반민주적 사건들을 보며 영화 제작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감독의 의도는 관객들을 폭력과 공포에 온전히 빠지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영화는 온통 충격으로 가득했다. 금품을 갈취하며 옅게 미소를 띈 하인의 표정과 총 앞에서 금세 비굴해지는 상류층의 모습에서 혐오를, 망설임 없이 민간인에게 방아쇠를 당기는 군부의 잔인함을, 벌거벗은 채 한 구석에 몰려 찬물에 씻어야 했던 인질들의 모습에 굴욕감을 느꼈다.

 

부패가 청산되고 갈등이 해소되는 대신 선한 마음은 짓밟히고 죄 없는 이들의 희생으로 얼룩진 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결말은 연속되는 폭력의 서사 위에서 커다란 절망만을 안겼다. 영화관이라는 장소 특성상 일방적으로 상영되는 서사를 그대로 지켜봐야 했던 관객의 입장에서 86분의 시간은 충분히 괴롭고 충격적이었다. ‘이거 봐, 이게 진실이야. 이게 너희가 외면하고 싶던 진짜 현실이야’라고 외치는 감독의 목소리가 그대로 느껴졌다.

 

감독은 관객을 고문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학교에서는 혁명을 자유, 평등, 박애를 앞세워 긍정적인 면모만 부각하지만 실제 현실은 피와 희생으로 얼룩져있다는 것을 조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은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현실에서 실제적 위협을 경험하는 대신 영화라는 안전한 매체 안에서 관객들이 현실을 경험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래야만 안락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현실의 부조리를 인식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다.


 

 

폭력으로 가려진 서사는 공포만을 남기고


 

감독의 의도는 적중했다. 관객들은 영화의 무자비한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드는 반감과 불쾌함이 가득한 채로 영화관을 나왔다. 분명 예술은 좋고 아름다운 것만 다루지 않는다.

 

일례로 스페인의 미술가 산티아고 시에라는 노숙자들에게 저임금을 주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매춘부의 몸에 문신을 하는 등 비윤리적 퍼포먼스를 했다. 기예르모 베르가스는 굶어 죽은 개를 전시했다. 이들의 작품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현대미술이라는 이름 하에 예술로 언급된다. 미셸 프랑코의 <뉴 오더> 역시 폭력으로 가득한 영화였지만 사회의 불균형을 강력하게 드러냈다며 평론가들의 호평과 함께 제 77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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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평론가들의 호평에 마냥 공감할 수가 없었다. 영화는 이야기의 한 부분을 뚝 잘라낸 듯 했다. 총소리와 비명, 유혈이 낭자한 화면이 쉴 틈 없이 이어지며 사건의 개연성과 장면의 의도, 서사를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연속되는 충격에 영화 속 장면에서 현실의 부조리까지 떠올려 볼 여력이 없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세상의 부당함에 공감하는 데까지 감상이 이어지는 대신 누군가는 혐오와 불쾌만 남은 채 끝나버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미셸 프랑코 감독은 폭력을 보여주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고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을 예로 들며 자신은 그와 달리 관객에게 감정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그건 다소 무책임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폭력을 보여줄 때 필요한 책임감이란 무엇일까.

 

미셸 프랑코의 연출은 관객에게 공포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제대로 목도하게 만든다. 끝없이 이어지는 부패의 재생산, 그것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나는 계속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폭력을 전시하는 것이 과연 현실을 조명하는 옳은 방법일까. 동시에 내가 바로 진짜 현실을 외면하려는 사람인 게 아닐까 하는 양가감정이 남는다. 이 문제에 쉽게 답을 내리긴 어려울 것 같다.



참고자료

amp.elperiodico.com/es/ocio-y-cultura/20210218/entrevista-michel-franco-director-nuevo-orden-11529690 

lavanguardia.com/cultura/culturas/20210116/6182756/nuevo-orden-michel-franco-cine-mexicano.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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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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