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무도 없지 않은, '아무도 없는 곳'

글 입력 2021.03.31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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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말과 다르다. 말을 주는 자가 있으면 받는 자도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말을 할 때 누군가가 받아주어야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인물들은 모두 '창석'과 대화를 나눈다. 마주 앉아서, 걸으면서, 때로는 공중전화선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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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석'으로 시작하는 영화. 차분하고 메마른 목소리의 그는 아마 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하다.

 

그리고 '미영'을 만난다. 유리창에 기대어 잠든 미영과 맞은 편에 앉아 소설을 읽는 창석. 다리가 짧은 검붉은 소파는 7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 커피를 팔지만, 찻집 같은 공간. 곧 잠에서 깬 미영이 묻는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제 앞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미영의 목소리와 달리 창석은 평온하다. 이상한 이질감이 공간을 메운다. 앳된 얼굴의 미영, 그보다 열 살은 많아 보이는 창석,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예스러운 공간, 당황한 사람과 평온한 사람.


몇 마디를 나누고서야 미영은 알아차린다. 소개팅하기로 한 분이시구나. 하지만 이질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소개팅 장소가 오래된 커피숍이다. 곳곳에 머리가 하얗게 센 중·노년이 보인다. 살짝 어깨를 웅크리고 책을 읽는 그들. 느리고 조용하다. 그들은 둘을, 둘은 그들을 개의치 않고 대화를 나눈다. 다정함 없는 대화에는 오묘한 긴장감이 담겼다. 아마 미영의 반응 때문일 거다.

 

두터운 카디건은 미영의 어깨 끝에 매달린 듯 걸쳐있고, 그 무게를 견디는 중인지 등이 구부정하다. 뱉어내는 이야기의 느낌도 비슷하다. 불퉁하고, 부정적이고, 힘없다. 이런 미영의 반응이 잠시 활기를 띈 건 창석이 즉석에서 지은 이야기를 들려줄 때다. 구연동화처럼 맛깔난 흐름은 끝에 다다르자 허무하고 어설프게 끝난다. 미영은 다시 지루하다. 연거푸 하품하다가 다시 머리를 창에 기댄다.


잠결에 이런저런 말을 뱉다가 문득, 깨닫는다. 제 아들, 창석을. 그래, 과거의 자신이 이곳에서 지금은 죽고 없는 남편과 소개팅을 했었다. 그 기억이 묻혔다가 잠시 반짝, 돌아왔다. 슬슬 일어나자는 아들의 말에도 녹진한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미영. 아들은 재촉하는 대신 미영의 옆으로 옮겨 어깨를 내어준다. 사라지는 기억, 무너지는 몸, 스러지는 말. 관객이 처음으로 목도한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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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석은 이런 식으로 죽음을 만난다. 후배 '유진'과 길을 걷다 죽어가는 새를, 기적을 믿던 '성하'의 눈이 배신감으로 굳어가던 모습을 본다. 기억의 절반 이상을 한쪽 눈과 함께 잃은 '주은'의 눈도, 본다.

 

유독 창석의 주위에 불편과 불행이 들끓는 것일까? 아니다. 신문에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식당의 한 테이블에는 수화로 떠드는 사람들이, 길거리에는 과거를 현재라고 착각하는 '미친' 사람이 있다. 언제나 있었다. 시선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세상은 희망과 사랑, 열정을 퍼부으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마냥 좋지 않다. 좋음보다는 어려움이, 기쁨보다는 힘듦이, 행복보다는 우울함이 삶을 지배한다. 부정을 부정하고자 '좋음'만 눈길을 주고, 말을 걸고, 보여준다.

 

이별, 슬픔, 미련, 아픔이 들어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 눈에 띄지 않는 공간으로 옮겨 간다. 찾아주는 이도, 누군가에게는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는 공중전화 부스를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것처럼 겉보기엔 아무도 없는 곳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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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조금씩 아프고, 조금씩 괴롭고, 조금씩 외롭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던 창석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죽음,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와이프, 와이프와의 이별. 미영, 주은, 유진, 성하의 이야기가 창석에게도 담겼다.

 

창석이 제 방 책상 위에 올려둔 청산가리. 타인의 죽음을 겪고, 듣고, 보면서 창석 자기 죽음도 마주해본다. 숱한 고민과 괴로움으로 새벽을 보내고 어둡고 푸르스름한 새벽, 집을 나선다. 그리고 소설처럼 적은 수필이 아닌 픽션을 짓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치유의 과정은 어느덧 끝났다. 낮은 조도가 점차 밝아진다.

 

 


 


'아무도 없는 곳' 티저 예고편

 

아무도 없는 곳
- Shades of the Heart -
  
 
각본/감독 : 김종관
 

출연

연우진, 김상호, 이지은, 이주영, 윤혜리

 

장르 : 드라마

개봉
2021년 03월 31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 85분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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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대박
    • 비평 감사합니다 영화보고 찜찜한 마음이 삭 풀리네요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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