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 서사에 대한 갈증, '정년이' 한 사발로 해소하다 [만화]

글 입력 2021.03.12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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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를 결정짓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당신이 만약 이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면 네이버 웹툰 <정년이>를 권하고 싶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작품 <정년이>는 여성 국극단을 배경으로 하여 오래도록 온전한 여성 서사에 목말라 있던 이들에게 한바탕 청량함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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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서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아주 오래도록 여성 서사에 대한 갈증과 이에 화답하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그 기준에 대한 구조화 작업은 아직 부족하다고 느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폭력과 차별의 혐의를 보여주거나, 여성의 주체적 욕망, 혹은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고난을 다루거나, 여성 창작가에 의해 발표된 작품만을 포함해야 한다는 등 여성 서사를 범주화하는 다양한 기준이 논의되어 왔다.

 

그간 여러 작품을 접하면서 개인적으로 여성 서사에 대한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작품을 찾아 콘텐츠 시장을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던 중 오아시스처럼 마주한 작품이 바로 웹툰 <정년이>이다.

 

 

 

1. 여성 고유의 욕망 표출


 

여성 서사를 정의하는 첫 번째 기준, 바로 여성의 고유한 욕망 표출이다. 여기서 '고유한 욕망'이란 타인, 특히 남성 권력자에 의해 재단되거나 사회적 여성성의 일환으로서 기대되는 욕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욕망에 가깝다.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여성 캐릭터는 '남성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만을 지닌, 때로는 그래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었다. 이는 곧 여성들 간의 경쟁이란 남성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일 수밖에 없는 서사적 당위를 만들어 버린다. 여성의 관계 안에서 남성의 권력이 무력화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드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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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서와 정년

 

 

'정년이'의 초반 갈등 구조는 영서와 정년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큰 인기를 끌던 여성 국극단, 매란국극의 단원들은 무대에 살고 무대에 죽는 열정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두 무대를 목표로 진취적인 삶을 이끌어 나간다. 정년이 처음 입단한 이유는 금전적인 성취를 얻기 위함이었으나 영서를 비롯한 동료 단원들은 그에게 또 다른 꿈을 키우게 한다.

 

매란국극단에서 이미 그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던 영서에게 억척스러운 데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정년의 등장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정년은 국극을 그저 돈벌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남다른 진중함을 지닌 영서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리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곧 국극 무대 자체를 두고 선의의 경쟁하기 시작하고, 그 사이에 남성의 권력이나 사회적으로 재단된 여성성의 가치는 완전히 제거된다.

 

오로지 돈만을 외치던 정년은 영서의 연기를 본 후 자신도 마음을 울리는 진정한 국극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서와 함께 말이다. 그들의 경쟁은 누군가를 끌어 내려 그 자리를 독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다.

 

 

너한테서 어떻게 무대를 뺏냐잉.

무대에서 살림 차리고 싶은 애처럼 연기허든디.

 

- 정년의 대사 中

 

 

영서는 여러 고비 끝에 춘향전의 방자 역할을 훌륭히 마친 정년의 능력을 인정하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다. 그들이 단순 '여적여' 프레임에 갇힌 관계가 아님은 여기서 드러난다. 영서와 정년은 이미 마음 깊이 연대를 쌓은 동료이자, 서로의 연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라이벌이다.

 

현실 속 여성들 간의 갈등은 이런 영서와 정년의 관계를 닮아있다. 능력과 성취를 가운데에 두고 펼치는 갈등은 남성 인물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성들은 서로의 생을 거울삼아 사랑이나 질투 등의 단순한 정념만으로 대변될 수 없는 서사를 축적한다. <정년이>에서 나타나는 모든 갈등은 이러한 다양성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한 작품 안에서 이토록 풍성한 여성 서사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2.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여성 인물 혹은 집단의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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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국극'이라는 소재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 국극단은 1948년, 남성 중심의 국악원에서 탈퇴한 여성 국안인들이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며 시작된다. 초기 여성 명창들은 남성들에 비해 음악인이 아닌 '능력 좋은 기생'의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고, 자연히 무대의 기회도 적었다.

 

여성국악동호회 회원들은 <옥중화>를 첫 작품으로 시작해 이내 큰 인기를 누렸지만, 그 전성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등 여가 콘텐츠의 대두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여성으로만 이뤄진 국악단이 괄목할 만 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시기와 이유 없는 힐난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진정한 국극인이 되기 위한 정년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여성 캐릭터를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외모부터 성격은 물론이고 가치관, 욕망, 목표, 그것의 달성을 위해 선택하는 방식까지 모두 다르다. 시원하게 뻗은 직선과 쨍한 단색으로 이뤄진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그림체는 여성 캐릭터들의 내면까지도 솔직하게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이다. 독자들의 표현을 빌려 이 '여름 같은 그림체'는 여성 인물들의 불타는 욕망과 그것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정년이>가 감히 온전한 여성 서서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다양성 때문이다. 즉, 여성이 지닌 소수자성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인물 구축 방식이다. <정년이>의 인물들은 서로에 의해 영향을 주고 받는 모습을 통해 '여성'이란 존재 자체를 무대 중앙으로 떠민다. 정년이는 여러 여성들의 삶과 국극을 향한 열의를 통해 국극은 자신의 능력만을 드러내 튀는 것이 아닌 '녹아드는 것'임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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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년이뿐 아니라 작품을 읽는 모든 여성 독자에게도 큰 함의를 지닌다. 여성들은 서로의 삶에 마치 하나의 단역처럼 녹아들어 연대한다는 사실. 서로가 서로를 주연으로 만들어주는 관계의 입체성이 여성들을 매란 국극단의 일원으로 느끼게끔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정년이>가 사랑 받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정년이>는 여성 국극 그 자체 같은 작품이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선인이든 악역이든 할 것 없이 실패와 성장을 마음껏 반복해가며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여성들에게 내어준 적 있는가. 남성 중심 서사의 고루한 전통에 시원하게 금을 내는 작품 <정년이>를 꼭 만나보길 바란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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