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차르트 교육법 [음악]

글 입력 2021.02.0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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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남매, 우월한 유전자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누나 마리아넬(Maria Anna Walburga Ignatia Mozart, 이하 나넬(Nannerl))이 피아노를 치던 것을 보고 흉내를 내다가 3살에 피아노 음계를 구분할 수 있었다는 유명한 유년시절 일화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피아노, 바이올린을 섭렵하다가 5살에 첫 번째 곡을 썼고, 6살에는 유럽 전역으로 연주여행을 처음 시작했으며, 12살에는 작곡한 10개의 교향곡을 황실에서 공연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청혼했다는 위험천만한 사건ㅡ모독죄로 간주되기 때문ㅡ이 이 때 있었던 일이다.


이 가족의 연주여행은 모차르트가 비엔나에 정착하기 전까지 계속 됐는데, 오히려 여행 초창기, 가장 유명한 것은 나넬이었다.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로 예술활동을 중단했기 때문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이하 볼프강)만이 현재까지 조명되고 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위대한 유전자 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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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넬 모차르트 (2010)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 (Johan Georg Leopold Moz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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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opold_Mozart (1765) by Pietro Antonio Lorenzoni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레오폴드 모차르트(Johan Georg Leopold Mozart, 이하 레오폴드)가 남매의 교육을 도맡았다. 그는 (하이든의 곡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장난감 교향곡을 비롯한 적지 않은 곡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학식이 높은 사람이 좋은 교육자와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구심이 남는다.


레오폴드 안톤 주교의 후원을 받아 궁정음악가로 활동했던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동시에 교육자이기도 했다. 18세기 연주법 연구에 대표적인 사료인 바이올린 주법에 관해 집필한 이론서는 당대는 물론 이후에도 권위있는 교재로 활용되었다. 독일 아우츠버그에서는 레오폴드 모차르트 국제 바이올린 콩쿨이 개최되고 있기도 하다.


이제 모차르트 남매의 조기교육을 쉬이 예견할 수 있다. 유전자와 환경의 콜라보레이션이 265번째 생일까지도 여전히 축하받는 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The Mozart family on tour by Carmontelle. 1763.jpg
The Mozart family on tour (1763) by Carmontelle

 

 

“이 아이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게한 것은 신의 기적이다.” : 위대한 음악가 제작을 사명으로 여겼던 레오폴드는 이렇게 말했다.

 

당대의 모든 예술은 신에 의한, 신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예술의 정점을 찍는다는 것은 신을 향한 헌신을 의미한다. 레오폴드가 신학대학을 다니다가 바이올리니스트로 전향한 것을 고려한다면 이 사명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것이 어느 정도였냐면, 바이올린과 작곡을 모두 포기하고 교육에 전념해 궁정음악단에서의 커리어는 (요즘 말로는)진급을 할 수 없었다. 연주여행 또한 당시 남매의 천재성으로 돈을 끌어모았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중서부 유럽을 망라했던만큼 비용이 만만치 않아 거의 제로썸에 가까웠다. 남매는 질병에 시달렸고, 이는 볼프강의 질병 목록이 무지막지하게 길어진 원인이 되기도 했다.


레오폴드가 이 재능 폭포수에 얼마나 신이 났던지, 아이들의 재능에 질투를 했던 모습은 어느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볼프강의 야망에 도덕을 강조하는 잔소리를 많이 했다.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의 공통점은 음악사에 남은 천재라는 점과 극성맞은 아버지를 두었다는 점이다. 베토벤은 제 2의 모차르트를 욕망하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다면, 모차르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재능을 극대화시킨 레오폴드의 교육법을 현대에 활용한다면 천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Young Mozart At Vienna.' Oil On Canvas By Gustave Boulanger, 1824-1888.png
Young Mozart At Vienna (1824-1888) By Gustave Boulanger

 

 

다만 아이들에게 집착한 나머지 독립시키려하지 않았고, 울프강이 비엔나로 떠난 이후에도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라고 연락하고는 했다. 나넬 역시 구혼자가 많았음에도 아버지의 반대로 (1700년대 후반이었음에도) 33세의 나이에 결혼했고, 그 후에도 아버지에 의존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대를 이은 육아는 마지막까지 레오폴드와 같이 살았던 나넬의 첫째 아이(Leopold Alois Pantaleon :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까지 이어진다. 레오폴드는 육아 보고서 형태 편지를 1주일에 한 번 꼴로 나넬에게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음악 교육을 이 아이에게도 시키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볼프강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동일한 교육을 했다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볼프강과의 관계는 나넬과 정 반대였다. 음악을 업무로 바라본 레오폴드와 즐거움을 위한 음악을 한 볼프강의 갈등은 깊었다. 볼프강은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ㅡ연주투어때문이긴 하나ㅡ했다. 그리고 약해진 면역력의 여파로 볼프강도 4년 뒤 35세에 단명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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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zart Family (1780-1781) by Johann Nepomuk Della Croce

 

 

모차르트 남매의 재능을 알아보는 이가 바로 옆에서 지지해준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정서적 지지자인 부모로서 레오폴드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틀어진 관계가 그가 그리던 것일리는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잦은 여행으로 잃은 건강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아동착취노동과 방임이다.


아버지의 교육에 대한 나넬과 볼프강의 의견을 들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 볼프강은 아직까지도 <모차르트 생일 주간>까지 축하를 받고 있으나, 정작 아버지에게 축하인사 한 마디 쉬이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레오폴드가 있었기에 볼프강이 있었고, 우리가 작은별 변주곡도, 밤의 여왕 아리아도, 돈 지오바니도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가 옳았다기보다 같은 혹은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설 발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35년동안 400여곡을 남긴 볼프강이 건강했다면 우리는 더 아름다운 곡들을 만나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여전히 모차르트의 교육법을 종용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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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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