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의 인생이 당도할 곳에 관하여 - 브루클린 [영화]

당신의 집은 당신이, 당신 곁의 사람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글 입력 2021.01.1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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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브루클린>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에일리스라는 젊은 여성이 우연히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 일자리를 얻고, 브루클린으로 건너간 이후 험난한 적응기를 거치지만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남자를 만나며 브루클린을 그녀의 새로운 집으로 삼는 이야기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진부한 스토리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한 평범한 사람의 도전과 눈부신 성장,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많은 이들의 도움의 손길과 크고 작은 연대를 섬세한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에일리스가 있다. 완전한 자의였는지, 자의 반 타의 반이었는지는 몰라도 에일리스는 친언니가 아는 신부님이 뉴욕에 구해준 백화점 점원 일자리를 수락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뉴욕으로 떠난다는 사실에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걱정이 동시에 쏟아지고, 그 가운데 에일리스는 이미 이방인이 되어버린 고독한 얼굴을 하고 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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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시작부터 험난하다. 기상 악화로 인해 배가 흔들리고, 이런 일을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에일리스는 지독한 멀미를 겪지만 옆 방과 함께 쓰는 화장실은 옆 방 사람들이 이미 잠가버린 뒤다.

 

그렇게 간신히 도착한 브루클린에도 여전히 에일리스가 마음을 둘 곳은 없다. 남 일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만을 좋아하는 하숙집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고, 밝은 얼굴로 손님과 ‘스몰 토크’ (small talk: 잡담, 담소)를 이어가야 하는 백화점 점원 일에도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혼자 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어느새 혼자가 더 익숙해진 에일리스에게 유일한 낙이 되어주는 건 아일랜드의 가족들이 보내주는 편지 뿐이다.

 

그럼에도 에일리스는 노력한다.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내고, 일자리를 구해줬던 신부님의 후원으로 다니게 된 브루클린 야간 대학의 회계 경리 수업도 누구보다 열심히 듣는다. 비록 아일랜드 커뮤니티 안에서지만 꾸준히 이런저런 모임에도 참석한다. 그렇게 에일리스는 자신이 갇혀 있던 작은 세계를 힘겹게 깨고 나와 새롭고 넓은 세계 안에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트는 데 성공한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지독하게 힘든 시간들을 전부 이겨내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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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에일리스가 일궈낼 수 있었던 성장에는 오롯이 그녀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의 곁에 머물어준, 혹은 스쳐 지나갔던 많은 이들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기에 에일리스는 정착할 수 있었다. 첫 여행길에서 만난 선실 룸메이트는 갖은 고생을 하던 에일리스를 간호하고, 에일리스가 무사히 미국 땅에 입성할 수 있도록 외모부터 마음가짐까지 에일리스의 모든 면을 재정비해준다. 미국에 가게 된 첫 소감을 “아일랜드에서 오는 편지는 얼마나 걸리는지 궁금하다”는 에일리스에게, 룸메이트는 “처음엔 아주 느리다가 점점 빨리 올 것”이라며 웃는다. 그리고 정말로 에일리스가 편지를 기다리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게 된다.

 

그것은 바로 에일리스가 브루클린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다. 에일리스의 상사는 다정하진 않아도 에일리스를 인간적으로 대해주고, 일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에일리스에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에일리스에게 처음 일자리를 주선해준 은인이자 후원자가 되어준 신부님은 따스한 격려로 에일리스가 한 걸음씩 지치지 않고 더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처음엔 밉상처럼 등장하는 에일리스의 하우스 메이트들도 점차 심적으로 편안함을 찾을 수 있는 관계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일리스에겐 토니가 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이 이탈리아 남자는 처음부터 에일리스에게 강한 호감을 보이고, 점차 그녀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에일리스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가득했던 하루하루를 토니와 함께 나눠 가지면서 외로움을 떨쳐내고, 토니를 통해 이전에는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들에 가게 된다.

 

‘나의 일상을 공유할 사람이 생긴다는 것’의 힘은 에일리스의 삶을 통째로 바꿔놓는다. 에일리스의 생활에는 활기가 차오르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가득 들어찬다. 에일리스에게 토니라는 사람은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자신을 이끌어 주고 그 안에 보금자리를 찾게 해 준 소중하기 그지없는 존재이다. 그녀의 손으로 찾아낸 집이자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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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 <브루클린>은 좁게는 한 사람의 적응, 넓게는 성장에 있어 타인과의 상호 교류와 연대의 중요성을 열심히 담아낸다. 에일리스가 언니의 죽음을 겪으며 아일랜드로 잠시 돌아갔을 때,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지 말지 고민하게 되는 이유 또한 사람이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자신과 비슷한 점이 많은 남자 짐과의 만남이 에일리스의 발목을 잡는다. 그렇지만 에일리스가 그 모든 것들을 두고 다시 미국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는 이유 역시 사람이다. 좁고 갑갑한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사람들을 떠나 에일리스는 브루클린의 토니에게로 돌아간다.

 

*

 

내가 이 영화 <브루클린>을 보며 에일리스 개인의 성장 스토리보다 에일리스라는 사람과, 에일리스 주변의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에일리스가 변화하는 모습에 좀 더 집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2년 전, 뉴욕으로 처음 떠나던 순간의 나에게 원대한 꿈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현실적으로 나의 미래에 (어느 정도일지는 몰라도) 분명히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아서 잡은 기회였고, 색다르고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한 유학이었다. 되려 미국 유학은 당시 나의 꿈을 이루는 것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랬기에 남들보다 훨씬 더 고된 향수병을 오랫동안 견디며 방황했던 것 같기도 하다.

 

죽을 것 같았지만 결코 나를 죽이지는 못했던 향수병이 결국 바닥을 드러냈을 때, 이미 미국은 내 삶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영어로 나누는 ‘스몰 토크’ (small talk: 잡담, 담소)가 편안해지고, 낯설었던 지명들은 익숙한 일상이 되었으며, 시선을 두기조차 두려웠던 도시의 곳곳을 혼자서도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뉴욕에 스며들기까지 수많은 이들의 미소와 크고 작은 도움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 나는 뉴욕을 또 하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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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에 나의 지난 2년을 통째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한 이 영화의 주인공 에일리스에게서 나는 나를 보았고, 에일리스의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의 은인들을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나를 스쳐간 호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붙들어 주었던 따스한 말들은 나를 뉴욕이라는 땅에 발도 정도 붙이게 했고, 나를 자라나게 했다. 미국 땅을 처음 밟는 아일랜드 소녀에게 충고하듯 흐르는 에일리스의 마지막 독백처럼 말이다.

 

“출입국 관리소에 가면 눈 크게 뜨고, 다 아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미국인처럼 생각해야 해요.

향수병에 걸리면 죽고 싶겠지만, 견디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어요.

하지만 지나갈 거예요. 죽지는 않아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태양이 뜰 거예요.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 희미하게 다가와요.

그러다 당신의 과거와 아무 관련도 없는 누군가를 만나게 될 거예요.

오로지 당신만의 사람을.

그럼 깨닫게 되겠죠. 그 곳이 당신의 인생이 있는 곳이라는 걸.”

 

이 독백은 나에게 남달리 인상 깊게 각인되었다. 꼭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이든 나의 집이 될 수 있고, 그 때 나의 곁에는 나에게 미소 지어주는 누군가가 항상 함께하고 있다는 걸.

 

 

[최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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