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 그리고 낙엽 - 파주여행기 [여행]

글 입력 2020.11.2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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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여행기는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조정 이전에

작성되었습니다.

 

 

파주는 우리 집에서 꽤 먼 곳에 있다. 길고 지루한 그 도로를, 가을이 아니었다면 차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바싹 마른 나뭇잎이 하늘을 스치며 만들어 내는 그 짧은 균열이 없었다면 나는 분명 도착하기도 전에 지쳤을 것이다.

 

알맹이 없는 대화가 앞좌석과 뒷좌석을 넘나들며 띄엄띄엄 이어지는 동안, 나도 조수석에 앉아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페인어로 ‘잎’을 뜻하는 단어는 ‘hoja’. 재미난 것은 ‘hoja’의 또 다른 뜻은 ‘책이나 종이의 한 페이지’라는 것.

 

오늘의 여행과 참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나는 또다시 유리창으로 곤두박질치는 나뭇잎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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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 헤이리 마을과 출판도시에서 머무르는 계획을 세우고 도착한 우리가 처음 들어간 곳은 한길 책 박물관이었다. 평일 오전이라 선택지가 많지 않았을뿐더러, 명색이 책을 주제로 한 여행이었으므로 괜히 책과 관련된 무언가로 여행을 시작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고서, 그리고 책에 수록되어 있던 다양한 삽화가 총 3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었다. 관람객은 우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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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 건너 또 한 집에 위치하는 수많은 카페, 지키는 이 없는 빈 갤러리들을 뒤로 하고 우리는 독립서점인 ‘오래된 서점’으로 향했다. 가게에도 길거리에도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마 시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토록 한적한 시간대에 한적한 곳을 다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낯선 얼굴을 만나지 않고 걷는 건 신기했다. 낙엽과 햇살만이 가득한 길거리에 멈춰 서서, 나는 자주 카메라를 꺼냈다. 프레임 안에 무엇도 걸리지 않는 느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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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서점처럼, 매대 위부터 구석구석 놓인 책장까지 책이 들어찬 ‘오래된 서점’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주 잘 정돈되어 있지는 않지만, 매일같이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음이 분명한 공간. 다들 어느 틈엔가 크기도 색도 제각각인 책을 두어 권씩 품에 안고 있었다. 읽고 싶은 책이 가득한 오래된 서점에서 아무 책도 사지 않고 버틴다는 게 나에게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래된 서점의 사장님은 한가한 오후에 갑자기 들이닥친 네 명의 손님들의 손에 이것저것 들려주며 인사를 건넸다. 일행이 아닌 타인을 만나는 것은 몇 시간 만의 일이었다. 사장님 또한 모르는 사람은 잘 찾지 않는 동네 책방에, 그것도 평일 낮에 한꺼번에 네 사람이 몰려오자 분명 궁금해하는 눈치기는 했다.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유난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았는데, 서점 문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

 

해가 지며 차마저 사라진 도로를 지나 우리는 출판단지로 향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출판단지 내의 게스트하우스 ‘지지향’이었다. 지지향의 로비는 ‘지혜의 숲’이라는 공용 서재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 투숙객은 물론 출판단지를 찾은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개방된 ‘지혜의 숲’은 이름에 걸맞게 책이 우거진 공간이다. 내부의 높은 층고는 진짜 숲이 그렇듯 안정감을 준다.

 

지혜의 숲의 책들은 다양한 연구기관, 학자에게서 기부받은 것인데, 책을 종류별로 분류하지 않고 기부자가 기부한 대로 모아 놓아 그들의 취향과 전공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다. 지지향 투숙객에게는 24시간 열려 있으니, 책을 읽고 사색하며 자신과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더없이 완벽한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제법 늦은 시간 도착한 우리는 오래된 서점에서 이미 책을 샀지만, 로비에서 몇 권의 책을 더 골랐다. 투숙객은 책을 대여해서 객실에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느 숙박시설과는 다르게 텔레비전이 없는 지지향의 정갈하고 고요한 객실에서는 누구든 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 침대에 기대 새로 산 책, 빌려온 책을 앞에 두고 하나씩 훑다 보면 금세 안정이 찾아온다. 핸드폰이나 텔레비전은 필요 없는 순간이 계속된다.

 

우리를 깨운 것은 자동차 소음이나 도시의 부산스러움은 아니었다. 그게 이곳에서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고. 지지향에서 체크아웃하고 나온 우리는 활판 체험을 하러 갔다. 사실 밥을 먹고 난 뒤 생긴 애매한 시간에 할 만한 게 없을까 하다가 시간만 보고 하게 된 것인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즐거웠던 경험이 되었으니 꽤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직접 인쇄할 글귀를 쓰고, 활자를 한 자씩 찾고, 나무판에 활자를 배열하여 프레스기에 넣는 과정이 전부 포함된 심화 과정을 해보기로 했다.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우리는 아주 신중하게 글귀를 골랐다. 나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외우고 다니는 시 하나가 없다는 게 이렇게 야속해질 줄이야. 이번 여행이 끝나면 꼭 시집을 많이 읽고 좋아하는 시를 적어도 세 개는 찾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이었다.

 

나는 결국 수없이 많이 들었던 한 노래의 가사를 찍어 보기로 했다. 어쨌거나 십분 뒤, 우리는 각자 마음에 드는 글귀가 적힌 종이와 활자를 골라 담을 나무판을 한 손에 들고 활판 공방을 활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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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프레스기 밑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거짓말처럼 글자가 살아났다. 누른 대로 찍힌 자국이 뒷면에 생생하게 남은 종이를 받아 들고 우리는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모두에게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가끔 학교 도서관에서나 보았던 오래된 책-귀퉁이가 노랗게 변하고 먼지 냄새가 나는 그런 책 말이다-처럼 명조체를 한 글자는 너무 익숙해서 새로웠다. 내가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 꽤 의미가 있는 문장이, 흐릿한 연필 자국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함께 할 잉크로 남게 되었다는 것은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프린터로 뽑는 것과는 아주 다른 기분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고작 엽서 한 장이었다. 하지만 아주 대단한 엽서였다.

 

그 이후에는 헌책방과 카페를 두어 군데 더 들린 것 같다. 하지만 천원 코너에서 발견한 ‘호밀밭의 파수꾼’의 원서를 제외하면 큰 소득은 없었던 시간들이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 가기로 결정했다. 지난 이틀간 우리의 모든 계획이 그랬듯, 큰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

 

이틀간의 여행이란 짧다면 아주 짧은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파주에서의 시간은 이상하게도 아주 천천히 가는 것만 같았다. 책, 그리고 낙엽에 둘러싸인 채 보낸 그 시간은 짭짤하고 강한 맛은 아니었지만, 아주 순했고 향이 좋았다. 오래도록 두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행이었다. 가는 길까지 낙엽이 지는, 이토록 아름다운 여행이라니, 가을보다 더 파주를 찾기 좋은 계절은 아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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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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