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모두의 사랑,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àlez-Torres)' [시각예술]

글 입력 2020.11.18 13:4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felix-gonzalez-torres.jpg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Félix Gonzàlez-Torres(1957-1996)


"쿠바, 뉴욕, 이민자, 유색인종, 동성애자, 에이즈"

"개념미술가, 현대미술의 신화적 아이콘, 예술가들의 예술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를 소개하는 짧디짧은 키워드이다.


위쪽에 나열된 키워드 몇몇은 어떻게 보면 대중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자극적인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또한 그저 다른 예술가들과 같이 사랑이라는 열렬한 감정을 예술로 승화했던 작가로 소개하고 싶다. 

 

 

 

"LA에서 로스의 초상화"



a4d84e746acb6ade9903f5c036519091.jpeg

Felix Gonzalez-Torres –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1991. ARoS Aarhus Kunstmuseum, Aarhus, Denmark.

Photographer: Lise Balsby. Image courtesy of ARoS Aarhus Kunstmuseum.


 

<"Untitled"(Portrait of Ross in L.A)>, 1991

 

얼핏 보기에는 가득 쌓인 알록달록 사탕 더미일 뿐이지만 이 작품 속에는 ‘죽음 앞에 소멸되는 육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관람객들은 한껏 쌓인 사탕을 자유롭게 가져가고, 만지고, 먹을 수 있다. 그렇게 사탕이 사라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탕은 다시 79.3㎏(175lb)만큼 쌓여있다. (79.3㎏은 그의 연인 로스 레이콕이 에이즈에 걸리기 전 건강했을 때의 몸무게이다)

 

로스의 육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그 사탕을 통해 로스는 생명력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는 사탕을 바라보며 로스를 생각하기도, 둘의 사랑을 짐작해보기도, 혹은 사탕의 달콤함을 느끼며 로스를 본인의 몸에 흡수시킬 수도 있다.

 

보통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라고 하면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거기에 작품을 마음대로 만진다고 생각하면 그리 아찔할 수가 없다. 그러나 토레스의 작품은 그렇지 않다. 관람객을 제삼자가 아닌 작품 그 자체로 만들어준다. 그 말은 관람객이 없으면 그의 작품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토레스의 작품은 물리적인 결과물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사탕을 전시장에 쌓아두는 일은 토레스가 아닌 전시장 관계자가 한 것이며 토레스는 그저 정량으로 쌓아둔 사탕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전시하는 사람의 결정에 따라 구성이 조금씩 변화할 수도 있다.

 

 

 

아이디어 = 예술?


 

저러한 작품을 두고 바로 '개념 미술'이라고 한다. 개념 미술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완성된 작품보다 그 안에 담긴 아이디어나 과정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미술적 태도를 말한다.


1917년, 미술의 판도를 완전히 뒤집어버린 작품이 하나 등장한다. 바로 R. Mutt라고 서명이 된 소변기이다. 무슨 작품인지 감이 왔는가? 그는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한 번은 꼭 들어봤을 법한 마르셀 뒤샹의 <샘>이다. 도대체 어쩌다 불결함의 상징인 변기가 '작품'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을까? 뒤샹이 이 소변기를 직접 조각하듯 만든 걸까? 아니다. 뒤샹은 그저 동네 철물점에서 소변기를 사 온 뒤 서명을 했을 뿐이다.

 


Marcel_Duchamp,_1917,_Fountain,_photograph_by_Alfred_Stieglitz.jpg

Marcel Duchamp, Fountain, 1917, photograph by Alfred Stieglitz at the 291 (Art Gallery) | Wikipedia

 

 

뒤샹은 '독립미술가협회전(indépendant, 앙데팡당전)'의 심사위원이었다. 독립미술가협회란 보수적인 살롱에 반대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뒤 19세기 말 새로운 미술의 포문을 연 협회로 이후 뉴욕에서도 현대미술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이다. 당시 앙데팡당전은 어떤 예술가든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자유롭게 출품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뒤샹의 <샘>은 협회 측에서 작품이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하고 말았다. '미술의 자유'를 주창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에서, 심지어 본인이 심사위원으로 있었던 행사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뒤샹의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뒤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예술에 한계를 두는 현실에 실망해 협회 내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게 된다. 어쨌든 개념 미술은 마르셀 뒤샹을 시초로 하여 현대 미술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게 된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데에는 아마 개념 미술의 등장이 한몫한 것 같다. 작품 속에 담긴 의미는 모른 채 당장 눈앞에 있는 이 물체를 보기만 하면 대체 왜 이 작품이 그리 비싼지, 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끄는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걸 작품이라고 칭한다면 내가 오늘 빨래 바구니에 던져두고 나온 잠옷도 작품이라고 칭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개념 미술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 기술의 발전으로 과거처럼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미술은 큰 의미가 없어졌고(찰칵! 한 번이면 아주 선명하게 순간을 담을 수 있는데 미술가가 온 영혼을 바쳐가며 현실을 그려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미술이 아닌 음악이나 문학은 개인의 아이디어를 작품 그 자체로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잘 생각해보면 미술이라고 해서 아이디어 그 자체를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뒤샹은 많은 사람이 속에서만 가지고 있었을 이 물음을 작품으로써 답한 것이다.

 

뒤샹이 소변기를, 토레스가 사탕, 시계, 베개 등을 예술로 탈바꿈한 것처럼 개념 미술은 우리가 늘 지나치는 소소한 일상을 재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일상을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게 만드는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어렵게 느낀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완벽한 연인들"



Felix-Gonzalez-Torres-Untitled-Perfect-Lovers-1991-clocks-paint-on-wall-overall-35.6-x-71.2-x-7-cm-scaled.jpg

Felix Gonzalez-Torres – "Untitled (Perfect Lovers)", 1991, clocks, paint on wall, overall 35.6 x 71.2 x 7 cm, photo: MoMA

 

  

<"Untitled" (Perfect Lovers)>, 1991


이 작품은 연인 로스가 에이즈로 투병하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작품의 설치 조건은 아래와 같다.

 

 

1. 위와 같은 모양의 시계 혹은 비슷한 모양의 시계를 사용할 것. 

2. 설치 직전, 두 시계에 조건이 같은 새 건전지를 넣을 것. 

3. 작품을 전시하는 국가의 시간에 맞출 것. 

4. 두 시계는 서로 맞붙여놓을 것. 

5. 처음에는 두 시계의 분침과 초침을 똑같이 맞추지만, 

결국 전시 중 시간이 서로 다르게 흐를 것이라는 이해를 전제로 할 것. 

6. 만약 한 시계의 배터리를 갈아야 한다면, 갈고 난 뒤에 두 시계의 시간을 다시 같게 맞출 것.

 

 

이 말인즉슨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 설치하는 사람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저 작가가 제시한 조건만 갖춘다면 어디서든 토레스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작품을 설치하고 나면 별문제가 없는 이상 처음에는 시간이 똑같이 흐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두 시계 사이의 시간은 서서히 벌어지고 결국 둘 중 하나는 먼저 수명을 다하게 된다. 이는 토레스와 로스의 삶 혹은 죽음을 보여준다. 똑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서로를 사랑했던 둘이었지만 결국 먼저 멈춰버린 시계처럼 로스가 토레스의 곁을 먼저 떠났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아무리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더라도 평생 둘 사이의 시간이, 사랑이 결코 같을 수는 없음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사랑이자 우리의 사랑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은 절대 그’만’의 사랑이 아니었다. 일상적 사물에 담긴 의미를 통해 우리에게 그들의 사랑을,  혹은 우리가 했던, 앞으로 할 사랑을 알려 주었다. 위에서 말했듯 그의 작품을 설치하는 사람이 누구고, 그 공간이 어디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어디에 살든,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누구를 사랑하든, 작품을 향유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가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서 활동했는지, 누구를 사랑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그저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를 표현했을 뿐이다.

 


Letter-from-Gonzalez-Torres-to-Ross-from-1988.jpg

Letter from elix Gonzalez-Torres to Ross from 1988


 

1988년, 나의 연인에게.

 

시계를 두려워하지 마. 그건 우리의 시간이고, 언제나 시간은 우리에게 너그러웠어. 우리는 승리의 달콤한 맛을 시간에 아로새겼지. 우리는 특정 공간에서 특정한 '시간'에 만나 운명을 정복했어. 우리는 그 시간의 산물이기에, 때가 되면 마땅히 갚아야 해. 

우리는 시간을 함께하도록 맞춰졌어, 지금 그리고 영원히.

사랑해.

 

- 토레스가 에이즈 판정을 받은 그의 연인 로스에게 쓴 편지

 

 

 


 

 

<참고 자료>

Wikipedia,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MoMA, “<“Untitled” (Perfect Lovers)>”

Art Institute Chicago, “<“Untitled” (Portrait of Ross in L.A)>”

Public Delivery, “The meaning of Felix Gonzalez-Torres - Torres’ Clocks / Perfect Lovers”

Felix Gonzalez-Torres Foundation

Wikipedia, "Marcel Duchamp"

네이버 포스트, 네이버 공연전시, "소변기가 예술? '앙데팡당'이니까!"

네이버 블로그, 동성갤러리, "사랑에 대하여_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유소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