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닙니다 [공연예술]

연극 '아들 Le fils'
글 입력 2020.11.0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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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은 특별히 잘못된 병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병이라는 의미에서 ‘마음의 감기’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인식이 조금씩 퍼지고 있지만, 우울증을 포함한 정신 질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히 분명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은 우울증이라는 병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내가 겪는 우울도, 나의 주변 사람이 겪는 우울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곤 한다.

 

특히 가족의 경우에는 더 복잡해진다. 가족은 가장 나를 잘 아는 사람, 무조건 나를 사랑해줄 것 같은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상처를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무리 화목한 가족이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이더라도, 결국 타인이다. 가깝기 때문에 더 이해할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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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들 Le Fils>에서 ‘안느’는 사는 게 버겁다는 10대 아들 ‘니콜라’를 홀로 감당하기가 어려워, 이혼한 남편 ‘피에르’를 찾아간다. 피에르에게는 이미 새로운 아내 ‘소피아’와 아들 ‘사샤’가 있다. 안느의 말을 듣고 피에르는 니콜라와 대화를 나눈다. 니콜라는 안느와 함께 살기 싫다며 아빠와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니콜라는 피에르의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무언가 나아지길 기대한다.

 

피에르는 이런 일들은 누구한테나 있는 힘든 시기일 뿐이며,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 일은 기억도 안 날 만큼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로 위축되어 있는 니콜라를 달랜다. 그가 겪는 일들이 심각한 것이 아니라 금방 지나갈 ‘감기’ 같은 것이라고 나름대로 위로를 하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니콜라에게 이 일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치유될 만한 것이 아니다. 분명히, 생생하게 겪고 있는 실체로서의 병이다. 니콜라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금을 웃으면서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피에르는 니콜라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되었냐고 계속해서 원인을 묻는다. 그 원인을 애인과의 실연이라고 멋대로 짐작하기도 한다. 하지만 니콜라 자신 또한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말해 보지만 그런 말은 이해받지 못한다. 그래서 니콜라는 그냥 피에르가 믿고 싶어 하는 말을 들려준다. 자신이 우울한 것은 애인과 헤어졌기 때문이고, 지금은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여 파티에도 갈 것이라고 말한다. 피에르는 니콜라가 자신과 함께 살면서 나아졌기를 바랐고, 믿고 싶은 대로 봤다.


니콜라는 자신의 우울함에 대한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배경에는 가족들에게 받은 상처가 있었다. 피에르는 소피아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버리고 떠났다. 남은 니콜라는 안느가 피에르를 향해 퍼붓는 저주의 말들을 들으며 자라야 했다. 안느 또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처가 버거웠을 것이고, 니콜라의 마음까지 헤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인 니콜라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니콜라에게 그것은 폭력과 상처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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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피에르는 지금까지 니콜라가 모두 거짓말을 했다는 것과 자해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자신과 달리 부족할 것 없이 자랐으면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묻기도 한다. “네가 이렇게 아무 말 안 하면 아빠가 널 도와줄 수가 없어.”는 피에르의 말은 니콜라를 이해하려는 태도 없이 탓하는 것이다.

 

결국 니콜라는 자살을 시도하고 병원에 들어가 1주일의 격리 기간을 보내게 된다. 1주일이 지나고 안느와 피에르는 니콜라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니콜라는 집에 돌아가게 해달라고 애원한다. 여기서는 도저히 괜찮아질 수 없다며, 집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있으면 전처럼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안느와 피에르를 설득한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안느와 피에르는 니콜라를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니콜라는 전과 같은 선택을 한다.

 

아마 니콜라에게 필요했던 것은 무언가의 해결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닌 이해와 치료였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쌓여온 상처와 우울로 인해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조차 없게 된 니콜라에게 ‘무엇 때문이냐’ 묻기보단 그 혼란한 마음을 헤아렸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관객, 즉 제3자의 시선에서 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판단이라는 생각도 든다. 과연 나는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안느나 피에르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타인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사는 것을 더 이상 못하겠다는 니콜라를 이해하지 못하던 피에르도 니콜라가 죽고 나서야 “살아지지가 않”는다는 감정을 직접 느낀다.

 

어쩌면 피에르와 안느는 니콜라에게 최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는 니콜라에게 상처였고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니콜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걱정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니콜라의 담당 의사는 갈등하는 안느와 피에르에게 “이건 사랑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 경우엔, 사랑만으론 충분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니콜라에겐 사랑뿐만 아니라 치료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안느와 피에르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우울증을 병으로 인정하는 태도였다. 안느와 피에르는 니콜라를 사랑해서 “진짜 그 애가 병이 있다고 생각해?”라고 물으며 애써 부정했지만, 잘못된 방식이었다. 우울증은 사랑과 보살핌으로 치유될 수 있는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이 아니라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이다. 니콜라를 잃고 주저앉아 우는 피에르의 모습을 보면 결국 모든 인물이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인식의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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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사랑하는 관계여도, 결국 타인이다. 타인의 고통과 마음에 온전히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도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온전히 공감할 수는 없어도, 타인을 이해해보려는, 그 마음에 닿으려 하는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다. 인간이라 부족할 수밖에 없지만, 부족하기 때문에 전문적인 의료기관이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전문적인 치료는 보충이 아닌 필수다.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더라도 치료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며 올바른 사랑의 방식이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의 감기’이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이라는 점에서 감기보다는 ‘마음의 독감’과 같은 표현이 더 적절하다. 오히려 감기라는 비유 때문에 그 심각성이 가려지고 있다. 이제는 우울증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며, 우울증 치료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인식이 더 필요하다. 그러한 사회 인식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는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니콜라’들이 건강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정다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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