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3. 내용이 '형식'이 될 때, '형식'이 내용이 될 때

그 바나나가 진짜가 아니고 청동 조각이었으면 어땠을까?
글 입력 2020.10.03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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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글은 완성되지 못한 사유 앞에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야만 했던 내 생각의 편린들이다. “나만의 결론이라도 충분히 내렸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아직은 “엄….”이라고 웅얼거린 상태에 놓인 사람의 글. “아, 그게요 아직도 이 부분이 아직도 궁금하고, 이렇게 말하기에는 어딘가 헷갈리고요...사실 제가 생각이 좀 너무 많아서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질문이 많이 일어날 예정이다.


마음을 조금 더 드러내자면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보고 생각하며 고민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다. 생각이 이어지는 과정 중간을 붙잡아 쓴 글이어서 내가 미술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이 더 그대로 드러난 글이 될지도 모르겠다. 단단한 벽돌이 아니라 무엇이라도 조금 더 흡수해보려는 가벼운 스펀지, 앞으로 더 묵직해지기를 꿈꾸는 글이라 하고 싶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던 낯선 작품 앞에서의 경험에 뒤이어 나의 화두는 바로 ‘내용’이었다. 내가 미술 작품을 통해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으로 읽어내고 풀어보고자 하는 것은 결국 어떤 ‘내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용 없는 작품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내용 없는 창작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예술의 내용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중에 “내용이 형식이 될 때”라는 말을 떠올렸다. 아마 혹자는 하랄트 제만이 기획한 전시 <태도가 형식이 될 때>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아마 분명 내가 이런 형식의 문장을 떠올리게 된 데에는 하랄트 제만의 전시에 대한 기억도 분명 역할 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아이디어의 시작점을 따지자면 이는 예술가 벤 샨의 강의를 담은 도서 『예술가의 공부』(유유 출판사)의 한 챕터인 “내용의 형상”을 읽으며 떠올린 것이었다.

 

 

보통 저는 예술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꺼내지 않습니다. 내용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예요. 저에게 둘은 불가분합니다. 형식이란 형상화입니다. 즉 내용을 물질적인 실체로 바꾸는 것, 내용을 다른 이에게 다가갈 수 있게 만드는 것, 내용에 영속성을 부여하는 것, 그리하여 내용을 인류에게 남기는 것입니다. 형식은 자연의 우연한 만남만큼이나 다채롭습니다. 예술에서 형식은 아이디어 자체만큼이나 다양해요.

 

- 벤 샨, 『예술가의 공부』 “내용의 형상”

 

 

그는 예술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여러 사례를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한다. “형식은 내용의 시각적 형상”이며 “‘형식이 곧 내용’입니다"라고. 그의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우선 적어도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 이해하는 것들 중 내용 없이 존재하는 건 없는 것 같다. 과연 내용 없이 어떤 형식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고 나는 여러 고민 끝에 ‘형식’을 이런 맥락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예술 작품은 무수한 요소의 선택과 배제 그리고 구성과 연결 등을 거쳐 나타난 어떤 ‘형식’, 다른 이들이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모습이나 상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다시금 벤 샨의 문장을 통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지, 작품이 품은 내용과 그것이 우리 앞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았고, 나로서의 생각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내용 없는 작품이란 것을 상상해보려 했다. 하지만 창작이란 것은 어떻게든 인간의 의지와 움직임이 더해지며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완전히 내용이 없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계속해서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아무 내용 없는 것을 만들어보세요”라는 미션을 받았다고 해보자.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옆에 나뒹굴고 있는 돌을 그냥 앞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았다고 해보자. 이것은 과연 아무 내용 없는 것일까?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왜 아무 의미 없음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돌을 선택했는가?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었는가? 다른 것은 선택할 수 있지 않았는가? 손으로 집어 올리지 않고 발로 툭 찰 수도 있지 않았는가?” 혹은 그 일이 일어난 배경을 향해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지시자는 아무 내용 없는 창작물에 관한 질문을 꺼내게 되었는가?” 꽤나 막연한 질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이 창조된 ‘형상’을 통해 일어날 경험의 여러 요소를 살펴보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꽤나 예리하게 다뤄지는 부분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이 자체를 작품이 지닌 내용의 한 갈래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석고로 조각된 바나나, 청동으로 만들어진 바나나, 그림으로 그려진 바나나, 진짜 바나나를 각각 마주했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이 모두 ‘바나나’로 이해된다 하더라도 아마 각각의 그것이 주는 느낌은 다를 것이다. 이제 그 바나나를 어딘가에 놓아보자. 나는 벽에 붙여보자고 제안해보고 싶다. 어느 벽인가? 새하얀 벽인가, 여느 레스토랑의 고급스러운 패턴 위인가, 마모된 흔적 가득한 콘크리트 벽 위인가? 그렇다면 그 바나나를 어떻게 붙이면 좋을까? 청테이프, 투명테이프, 접착제, 알록달록한 패턴의 마스킹테이프 등등 선택지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 한편 바나나가 놓인 그 공간은 무엇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며, 어떤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는지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무엇인가를 얘기하기 위해 바나나와 이런 방식을 선택했다고 해보자. 무엇을 전할 수 있기에, 그런 방식은 다른 방식과 무엇이 다르길래 바나나를 선택하고, 벽에 붙이게 된 걸까?


갑자기 바나나를 벽에 붙인다는 상상으로 별걸 다 고민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아마 짐작하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위 문단은 한때 미술계를 넘어 세계 곳곳에 이슈와 논란을 일으켰던 예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12만 달러 바나나”를 상상하며 썼다. 벽에 진짜 바나나를 은색 덕트 테이프로 붙여 놓은 작품 말이다. 그의 바나나는 우리나라에서도 “예술이란 정말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언급되었을 정도로 미술계에 여러 해프닝을 일으켰던 문제의 작품이자 이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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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우리치오 카텔란, 코미디언, 2019

 

 

세계 곳곳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를 “$120,000 BANANA”라 불렀다. 한화로 약 1억 4천만 원에 거래된 바나나라니(정확히는 바나나가 아닌 작품의 개념이 담긴 인증서가 거래된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벽에서 바나나를 떼어 먹어 버린다. 사람들은 경악했지만 갤러리 측은 바나나는 작품 자체가 아닌 발상이기 때문에 작품의 훼손이 아니라며 다시 새로운 바나나를 붙였다. 그러자 더 많은 사람이 그 바나나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결국 통제되지 않는 군중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안전상의 문제로 작품 전시를 중단하게 된다. 갤러리 측은 전시 중단을 알리며 이 작품의 여정에 “참여한”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미술 작품이 거래되는 아트 바젤의 한 부스, 은색 덕트 테이프로 새하얀 벽 위에 붙여진 진짜 바나나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제목은 <코미디언>이었다.


<코미디언>을 전시했던 갤러리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두고 여러 형태의 바나나를 고민했었다고 한다. 이동할 때마다 자신의 호텔 방에 바나나를 가져다 두면서 영감을 찾아내려 했던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레진, 청동 조각 등 바나나 모양의 조각을 생각하다 결국 최종적으로 처음의 아이디어였던 진짜 바나나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1).


나로선 적어도 그것이 진짜 바나나가 아닌 청동이나 레진 조각이었으면 이만큼의 이슈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데이비드 다투나도 아트 바젤에서 ‘배고픈 배’를 채우지 못했을 것이고, “12만 달러를 배고프다는 이유로 꿀꺽한 해프닝”도 이토록 이슈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결국 그 ‘바나나’가 12만 달러로 거래되었기 때문에 더욱이나 이슈가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논란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면 그렇다. 그래서 <코미디언>은 미술 시장에 놓인 많은 배경과 맥락, 그리고 여러 방향의 관점을 들춰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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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va Uzcategui/Reuters)

 

 

<코미디언>의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그런 ‘형식’으로 나타난 <코미디언> 주변에서 발생한 모든 일들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계에 중요한 행사인 아트 바젤 현장 어딘가 붙어 있던 바나나 하나로 일어난 이 모든 일을 단편 영화로 만드는 상상을 해봤다. 왠지 모르겠지만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을 대체할 만큼 좋은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영화는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누가 유머를 던진 코미디언이고, 그 유머의 대상이 된 코믹한 사건은 무엇이었을까?


다시금 그 바나나가 청동 조각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덕트 테이프로 대충 붙여진 게 아니라 다른 조각 작품을 벽에 걸 때 사용하는 장치로 섬세하게 걸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아마 그랬었다면 꽤나 당연하게 손대거나 훼손되어선 안 되는 작품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만약 바나나가 아닌 사과였다면? 누군가는 선악과의 비유를 끌고 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벤 샨의 말이 떠오른다. "‘형식’은 곧 내용이다." 여러 방향을 생각해 보니 작품의 ‘형식’을 이루는 요소의 선택은 ‘그냥’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런 ‘형식’으로 나타났기에 새롭게 일어난 다양한 내용과 우연들을 보자면 말이다.


<코미디언>을 “진짜 바나나”로 구성하기까지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고민은 꽤 깊고 섬세했을지도, 혹은 원래 그런 위트와 유머를 구사하는 감각이 탁월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흠, 정말 무어라 단언해야 할지 나도 아직 잘 모르겠으니 그냥 생각으로만 남겨두려 한다.


어떻게 보면 예술은 결국 인간이 주어진 세상 앞에서 무엇을 인식하고 붙잡을 수 있는지, 붙잡은 그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내용을 전하거나 만들어내고, 당대의 상황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세상에 남길 수 있는지에 관한, 어쩌면 인간이라 할 수 있는 몸부림으로 보이는 과정에 관한 치열한 실험과 실천이 일어나는 영역인 것 같다. 바나나를 두고 이 많은 일을 일으키고 말할 수 있는 인간, 우리의 단상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그래서 예술은 정말 단번에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어느 곳에서는 바나나 하나로 정말 단번에 감당 안 되는 무지막지한 유머가 넘쳐나는 것처럼 말이다.


*


왠지 모르게 한 예술가의 바나나에 푹 빠져 있다 멀리 돌아온 느낌이 든다. “내용 없는 작품이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바나나를 두고 작품을 하나의 ‘형식’으로 나타내기까지 일어났을 예술가의 선택의 과정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하고 질문해보았다. 다른 요소나 느낌으로 구성된 ‘형식’으로 나타났다면 지금과는 다른 의미나 내용 혹은 해프닝이 발생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편 나는 이런 질문을 떠올리기도 했다. 작품의 내용은 오로지 작품 안에만 있는 것인가? 그러니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있었던 의도와 내용만이 작품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어떤 ‘형식’으로 완성되어 드러난 작품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관객의 경험과 해프닝은 작품의 내용과는 다른 것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로 이 질문을 거두었다. 잘못된 질문이라기보다는 경계를 긋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자 그 내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술가가 완성한 작품 자체에만 내용이 있다고 보는 것은 좁은 틀에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 오늘날에는 여전히 진행 중인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다른 이들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고자 하는 작품도 존재한다. 자연스레 관객이 참여하며 완전히 통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예상된 혹은 예상하지 못한 여러 해프닝이 일어난다. 나는 이러한 사건들 역시 과정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작품을 통해 일어난 새로운 예술의 내용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예술가의 과정을 거쳐 어떠한 내용이 ‘형식’이 되고, ‘형식’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새로운 내용이 일어난다. 문득 생각하자니 예술을 이루는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점점 더 구분이 모호하게, 저마다의 자유로운 방식으로 일어나고 존재하는 것 같다. 어쩌면 이제는 이것을 일일이 따질 필요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늘 나타나는 새로운 것 앞에서 새롭게 내용을 읽어내는 과정은 과거보다 더 많이 그리고 익숙하게 일어나는 일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이제 관객은 예술 앞에서 작품을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서로 상호작용하고 소통하는 입장을 가지게 것 같다.


생각하다 보니 ‘내용’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해보지 못했다. 예술의 내용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자연스레 떠올리고, 느끼고, 읽어내고, 사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 내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술의 ‘내용’은 완전히 개입 불가능한 최종적인 상태에 도달한 것이 아닌, 늘 유동적이고 그것만의 가능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예술 작품은 인간보다도 더 오래 세상에 남아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며, 지금도 저마다의 다채로운 ‘형식’으로 새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예술에 마음을 두어 찾아가고 함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 "Someone ate a $120,000 banana that an artist had taped to a wall", by Rob Picheta, CNN, 9th Decamber,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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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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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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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의세상
    •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저 작품이 갖는 의미가 궁금했던 차에 예찬님의 글을 보게 됐어요!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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