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아버지는 사라진다 - 아버지의 사과 편지

이브 엔슬러의 '아버지의 사과 편지'를 읽고
글 입력 2020.09.2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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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친족 성폭력과 가정 학대를 경험한 피해 생존자가 자신을 줄곧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어린 날의 이야기를 낱낱이 글로 옮겼다. 그것도 가해자인 아버지의 목소리로.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독자를 불편하게 한다. 소개글을 보고 읽기 쉽지는 않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어려웠다. 역자는 한 장 번역하고 차를 한 잔 마시고 한 장 번역하고 방을 한 바퀴 돌았다는데, 나 역시 그랬다. 다른 누구도 아닌 피해 당사자가 쓰기로 결심한 책이고, 이 글이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려는 시도라고 언급한 머릿말도 읽었으면서 마음이 여러 차례 갈팡질팡했다. 가혹하고 집요한 학대 내용 못지 않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애칭으로 부르며 자신의 잘못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사과 편지'라는 글의 형식이 충격적이었다. 뉴스 보도를 듣거나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저자는 아버지를 잘 모르기에 이 글을 쓰며 상당 부분을 상상에 의존했다고 한다. 그러니 실제로 가해자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묘사된 대로라면 그의 폭력은 뒤틀린 애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지점이 특히 불편했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사랑과 학대 사이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악한 사람을 무작정 악마화하기보다 악을 분석하고 이야기하여 세상을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어떤 악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지 않을까. 어떤 철학도 원리도 구조도 없어서 분석되지 않는, 분석할 필요가 없는 악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는 자신을 파괴한 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이 더 괴로웠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브 엔슬러야말로 오랫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사고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파괴한 악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해석해냈다.

 

 

 

침묵의 세계를 깨뜨리는 말과 글



 
나는 독이 스며든 토양에서 자랐지. 나의 아버지인 하이만이 이곳에 있고, 그의 아버지, 또 그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있어. 자비 없는 혼란으로 이 세상을 무참히 망쳐놓은 아버지들이. (...) 영원토록 그들은 여기서 죽고 또 죽게 될 거야. 이들이 나의 아버지다. 이들이 바로 남자다. 가장 고귀한 부름에 충성했던 자들. 복종이 논리와 도덕과 감정보다 중요했던 자들. 138-139쪽
 


죽은 지 30년이 넘도록 사라지지 못한 저자의 아버지는 세상의 경계인 '림보'에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림보가 한 사람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림보는 사과하기에 실패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의 것이다. 그곳에 있는 것은 한 사람을 파괴에 이르게 한 악을 탄생시키고 용인했던 사회와 그런 사회를 지탱하던 가치관이다. 오랜 세월 이 세상을 지배하던 왜곡된 '남성다움'이다.

 

 

나는 말을 하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어. 침묵이 나의 권력이었다. 말은 주문을 깨뜨리고 현실을, 그 흉측한 건을 그대로 드러낼 터였으니까. 75쪽

 

침묵은 우리의 연대야. 이야기하지 않은 것, 밝히지 않는 것은 우리의 무기고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무기지. 141-142쪽

 


아버지들의 세계를 유지한 건 침묵이었다. 침묵 속에서 권력은 지켜지고 잘못은 은폐되었다. 그러므로이 세계를 깨뜨리는 것은 말과 글이다. 이브 엔슬러는 침묵에 맞서 언제나 말하고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200여명의 여성들에게 여성의 성기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사과편지>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물은 아니다.

 

그는 말함으로써, 글을 씀으로써 아버지들의 공고한 세계에 균열을 냈다. 무책임하게 사라진 사람들을 소환해 사과를 하게 만들었다. 침묵 속에서 행해지던 그 모든 일들은 이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폭로되었다. 아버지가 보내는 사과 편지라는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글은 결국 이브 엔슬러 스스로를 위한 치유 과정이다. 동시에 더 이상 그들의 세계는 유효하지 않다는, 세상 앞에서의 어떤 선언이다. 아버지와 딸이라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책은 그렇게 사회적으로 확장된다.

 

 

 

피해 생존자는 가해자보다 강하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고요히 밀려가는 바다에서, 햇볕에 시달리는 한 마리 게처럼 나는 기어 나온다. 따뜻한 모래 위에 쓰러진다. 지치고 온몸이 부서진 채로 거기에 누워 있는다. 며칠,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그곳에 있는다. 나는 다시 형태를 갖춘다. 나 자신이 느껴진다. 내 옷은 사라져버렸고 성별 구분도 의미 없는 것이 되어 있다. 작은 가슴과 더 짧은 다리와 더 작아진 발이 전부다. 부드러운 배도 생겼다. 왼쪽 눈 위에 작은 사마귀 두 개가 있다. 이것은 너의 얼굴이구나, 이브. 이것이 너의 몸이구나. 나는 그 안에 있다. 피가 보인다. (...) 나는 상처였고, 상처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나는 타오르고 있다. 182-183쪽
 


가해자들은 때로 어처구니없이 쉽게 죽곤 한다. 도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죽음이 피해 생존자에게 사건의 종결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해자인 아버지는 오래 전에 무책임하게 죽어버렸지만 저자는 그가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을 헤맸을 것이다.

 

그걸 드러내기라도 하듯 책의 막바지에서 아버지가 있던 림보는 저자의 마음 속 어떤 차원으로 표현된다. 마침내 사과를 마치고 사라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작가 역시 오랜 세월 마음 속에 묻어두고 앓았던 것들을 어느 정도 떠나보냈다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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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엔슬러는 무책임하게 죽어버린 자신의 아버지보다 언제나 더 강한 사람이었다. 그 오랜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파괴한 자신의 딸을 끝내 똑바로 바라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저자는 그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피해자'라는 표현보다 '피해 생존자'가 훨씬 더 적합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순간에도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을 수많은 피해 생존자들을 떠올린다. 책을 읽기 전에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여성들에게'라는 도입부 문구는 일종의 위로 같았다. 그러나 완독 후 은유 작가의 해제까지 읽고 난 다음 다시 본 문구는 여성들에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려는 말로 읽힌다.


진정성 있는 사과가 드물기 때문에 사과는 너무 고전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폭력과 침묵으로 유지되던 아버지들의 세계는 또 다른 폭력이 아니라 사과라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로써만 청산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브 엔슬러는 그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왔던 것들에 마침표를 찍고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 용감한 사람과 동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며, 나 역시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악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가해자보다 강한 피해 생존자들이, 사과하지 않는 아버지들의 세계를 끝장내는 이 움직임에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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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과 편지

- 딸아 미안하다. 그건 강간이었다. -


 

지은이 : 이브 엔슬러

 

옮긴이 : 김은령


출판사 : 심심


분야

외국 에세이 / 여성학


규격

133*193


쪽 수 : 208쪽


발행일

2020년 08월 14일


정가 : 15,000원


ISBN

979-11-5675-835-8 (03300)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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