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 움직이는 눈: 눈은 마음의 창 [사람]

글 입력 2020.03.0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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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심해지면서 마스크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지하철이나 버스와 같이 밀폐된 공간뿐만 아니라 트인 길가에도 사람들 대부분 마스크 쓰고 다닌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눈밖에 안 보인다.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턱 아래부터 콧등까지 올린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는데, 비록 얼굴의 절반을 가려져 있지만, 사람들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출근하기 싫다’라는 지루해하는 눈빛,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눈빛, ‘재미있다’ 웃긴 상상을 하는 듯 즐거운 눈빛을 알아챌 수 있었다. 눈이 말을 하고 눈으로 생각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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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생각보다 감정을 숨기기 어렵다.


 

눈빛이 다 드러내기 때문이다. 감정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경찰과 같이 권위자들은 선글라스 쓰지 않는가? 우리는 눈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연인과 전화로 실컷 싸워도 막상 만나서 눈을 마주치면 분노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지 않는가? 다툼 이면에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눈으로 노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연기 잘하는 배우를 괜히 바로 ‘눈빛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눈빛은 구구절절한 수식어와 언어표현으로 설명이 안 되는 복잡한 만감을 단번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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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남과여>가 예시로 들기 적합할 수 있다. 대사는 많지 않아도 감정과 감성은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상민(전도연)은 기홍(공유)에 마음을 온전히 주려고 가정을 뒤로 둔 채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그가 결국 다른 길에 선택한 것에 절망하고 만다. 여전히 기홍은 상민을 사랑하긴 했지만, 자신만을 바라보는 부인과 딸을 버릴 수 없었다. 상민(전도연)과 기홍(공유)는 마지막에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된다. 기홍은 알 수 없는 복잡한 표정에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낸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사랑했던(혹은 사랑하는) 여자를 앞에 두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 등 이 모든 것이 그에게 어떤 감정이었는지 눈빛만으로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연극배우 오달수는 이런 얘기까지 했었다: “1997년 ‘남자 충동’이라는 작품을 준비할 때였다. 당시 배우들끼리 모여 앉은 뒤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오로지 눈빛만으로 동료들에게 자기 생각을 알아맞히게 하는 훈련을 했다. 의외로 10명이면 7명의 눈빛을 다 맞혔다. 그런데 그 눈빛이 ‘슬프다’ ‘기쁘다’ 같이 쉬운 표현만 아니라, 예를 들면 ‘애국가’ ‘밥’처럼 황당한 눈빛들도 다 맞히더라.”

 

 

 

눈빛으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것이 진짜 과학적으로 맞는 말일까?


 

이에 대한 많은 과학자가 의문을 가졌다. 동공의 경우, 크기가 감정에 따라 달라진다. 동공이란 홍채 중심에 있는 지름 2~6mm의 빈 곳을 말합니다. 이런 연구도 있다: 남들 앞에서 야한 영화 포스터를 볼 때 표정이나 몸가짐은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안구추적 기술을 쓰면 동공이 열리고, 포스터에서 자극적인 부분으로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처가 난 아기처럼 보기 불편하거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볼 때는 동공이 점점 수축하기도 한다.


만일 동공이 우리 눈동자의 중심이며 우리가 동공의 크기로 감정을 알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감정에 불가피하게 노출되어있다. 동공의 수축과 이완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찰처럼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 이상 말이다.

 

눈이 없으면, 다른 말로 동공의 존재가 없으면 둘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감정이 없거나 감정이 지나치게 많거나. 난 전자인 경우는 로봇이나 공포 인형처럼 무서운 느낌을 받고 후자는 슬픈 느낌을 받는다.


몇 년 전,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의 눈에서 슬픔을 느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초상화의 눈 대부분은 초점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눈동자가 없어 보였다. 2차원 평면이지만 3차원의 터널처럼 눈은 쑥 들어가 있었다. 그 초상화의 대상의 사연이 담겨 있었던 것 같기 때문이다. 눈동자만으로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 사람의 삶의 이야기가 너무나도 깊었기 때문일까? 눈빛을 통해 감정을,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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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마음의 창이다. 아니, 과장을 조금 보태면 인생의 축소판이다.


 

모든 것을 꼭꼭 숨기며 속일 수는 있어도, 눈동자만큼은 숨길 수 없다. 눈동자는 아킬레스건처럼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리얼리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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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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