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구태여 '여성'을 설명하지 않는 연극 -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

글 입력 2019.10.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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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캐릭터’나 ‘여성 영화’란 언어를 구태여 동원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남성 중심의 서사와 캐릭터가 활개 중이다. 구별하고 싶지 않지만, 저울의 무게가 지나치게 한쪽에 치우쳐 있다. 이 상황을 중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언어들이 구사되는 듯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성 캐릭터는 <고백>의 ‘유코’와 <비밀은 없다>의 ‘연홍’이다. 흥행을 위한 기성품 서사가 양산되고 스테레오 타입에 갇힌 캐릭터가 즐비한데, 여성 캐릭터가 활용되는 방식은 그중에서도 제일 고루하다. 서사의 중심에 머무르는 경우가 적고 수동적 성격에, 비중 있게 등장해도 멜로나 로맨스 같은 특정 장르에 한정돼 있다.

 

‘유코’와 ‘연홍’은 다르다. 그들이 딸의 복수를 하기 위해 혈안인 건 단지 여성이라면 으레 갖고 있는 모성 때문이 아니다. 영화에서도 그렇게 묘사하지 않는다. 유코는 냉소적이고 차갑다. 냉소의 기반엔 분노가 있다. 그가 분노를 드러내는 방식이 냉소다. 딸의 죽음뿐 아니라 죽음을 둘러싼 사위의 반응이 그의 분노를 더 키웠다.

 

그는 칼을 가는 인물이다. 연홍은 훨씬 감정적이다. 그는 영화 내내 다양한 층위의 감정을 보여준다. 애증, 분노, 사랑 등등등 그가 행동하는 이유를 단지 하나로 설명할 수 없고 영화는 그 감정의 기원을 추적한다. 그리고 내가 그 영화들을 좋아하고 해당 캐릭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구태여 여자라서, 여자니까 란 수사를 붙이지 않는 데에 있다. 별도의 부연을 늘어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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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도 유사하다. 5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농구하는 이유는 별 거 없다. 그냥 하고 싶어서. 이 연극이 페미니즘 연극으로 호명되는 것도 그런 이유일 테다. 여성이 땀 흘리며 농구하고 연대함을 서사로 보여주는 것 자체가 페미니즘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여전히 스포츠는 남성만의 전유물로 규정되니까.

 

<레몬 사이다 썸머 클린샷>은 여성의 아픔, 사회적 지위 같은 것들을 구태여 농구와 결부하지 않는다. 그들이 농구하는 이유를 공들여 설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함이 여성이니까, 여성이라서. 란 수사를 자아낼 거라 인지하고 조심하는 듯하다.

 

팀에 가장 늦게 합류한 건 연정이다. 그때, 그 시간에 레몬 사이다 마시며 운동장에 있었기 때문에 합류한다. 연정은 레몬사이다를 먹고 맛없다고 상기한다. 그때 연정이 레몬 사이다를 마시지 않았다면 팀에 합류했을까. 재영은 연정에게 공 한번 던져보라고 말한다. 농구는, 지금 당신이 공을 잡고 저 골대에 넣는 게 전부다. 던지고 받는 순환의 일종 같은 거라고 언급한다. 그래 별 거 없지. 연정은 재영의 말을 듣고 그렇게 되뇌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가 먹는 레몬사이다처럼 별 것 없는 순간과 일상의 누적이 삶을 만들 테다. 농구도 마찬가지일 거고. 연정은 레몬사이다 캔을 버린다. 맛없다고 되새긴다. 농구하겠다고 선언한다.

 

연정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언어는 ‘포기’다. 자신은 진득하게 무언가를 완성해 본 적 없다. 도중에 지레 포기하는 인간이고, 무언가에 열렬해 본 적 없다고 느낀다. 그는 농구를 통해 변화한다. 실패하고, 유치해지고, 넘어져 무르팍이 깨진다. 그러면서 포기하건 말건 그것 그대로 괜찮다고 느낀다. 또 포기하고 말 거라는 강박 같은 거 가질 필요 없음을 체득한다. 그의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그제야 비로소 경기에서 골을 넣는다.

 

<레몬사이다 썸머 클린샷>은 솔직하다. 그들이 처음 갈등을 겪는 순간은 초등학생과의 농구 시합에서 지고 난 후다. 초등학생과의 시합에서 졌다는 굴욕감, 낭패감, 부끄러움이 서로를 겨냥하여 할퀸다. 빈약한 갈등인 것처럼 보인다. 계기의 아귀가 맞지 않는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도 그랬다. 앞으로도 그렇다. 유치하고 별 것 아닌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구차해지는 당신과 나였다. <레몬사이다 썸머 클린샷> 별 것 아닌 것들에게서 삶을 통찰한다.

 

마지막 경기 장면은 제한된 공간에서 관객이 만족할만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고심한 것처럼 보인다. 돌발적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을 의식하고 합과 동선을 맞추어 연습한 흔적이 역력하다. 좋은 연출이다.

 

<레몬사이다 썸머 클린샷>은 유의미하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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