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곳에도 여성이 있었다 [영화]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 감독의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글 입력 2019.08.2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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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권장도서로 어떤 책을 읽게 되었다.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된 그 책은 꽤 얇아서 쉽게 읽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과 달리 정말, 정말 읽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같은 판형으로 만날 수 있는 그 책은 바로 러시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쓴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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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아직도 학창시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을 때 느꼈던 당혹감을 기억한다. 소련 노동수용소(굴라크)에서의 삶을 다룬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저자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이 책을 읽던 나는 굴라크가 무엇인지, 왜 책 속 인물들이 저렇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더 많은 자료를 접하게 되면서 굴라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혹독한 추위와 고된 노역, 인권 침해, 질병 등에 무자비하게 노출된 굴라크에서의 삶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굴라크는 분명히 존재했다. 굴라크에서의 삶을 우리는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일부나마 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굴라크에 관한 증언 대부분은 남성의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굴라크에도 분명히 여성 수감자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제16회 EBS 국제다큐영화제 경쟁작으로 굴라크 여성 수감자의 이야기를 다룬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 감독의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이 출품되었다. 8월 23일 구름아래소극장에서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영화 상영과 함께 감독 GV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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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EBS국제다큐영화제 포스터



굴라크에 수감되었던 여성 생존자 여섯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며 동시에 사회를 고발하고 있다. 영화의 첫 시작은 공산당의 날 퍼레이드이다. 구 소련의 깃발을 든 사람들이 레닌과 스탈린의 초상을 들고 행진한다. 소련은 붕괴했지만 그 영향은 아직도 존재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편에서는 굴라크 희생자를 기리는 '이름 돌려주기' 행사가 진행된다. 희생자의 이름과 그들을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말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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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 감독, 2018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굴라크 생존자는 간호사, 작가, 음악가, 통역가 등 다양한 사회 계층 출신이다. 그들이 굴라크에 수감된 사연도 제각각이다. 미국에서 공부한 부모님을 둔 한 여성은 부모님이 먼저 체포, 처형된 이후 체포되었다. 어떤 이는 남편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되고 난 이후 따라서 체포된다.


음악가를 꿈꾸던 여성이 전쟁이 시작되자 피아노 앞에 앉아 파시스트 찬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체포된 사연은 탄식을 나오게 한다. 독일어 등을 비롯해 몇 개의 외국어를 구사하던 한 여성은 통역했다는 이유로 체포된다. 서로 다른 사연, 각자의 이유로 체포되고 엉망진창인 재판을 받은 채 그들은 노동교화형을 선고받는다.


죄수들에게 가장 힘든 과정은 바로 수용소로 이송되는 단계라고 한다. 춥고, 비위생적이고, 기나긴 이송 과정이 끝나면 수용소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죄수들이 하게 되는 노동은 다양하다. 농장, 벌목, 광산. 온갖 위험에 노출되고, 하루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조금의 식량도 받을 수 없다.


굴라크가 소련의 경제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는 말도 있지만 생존자의 증언을 듣다 보면 그 말에서 아무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 우라늄이 나오는 광산에서 방사능에 대한 어떤 의식도 없이 맨몸으로 강제노동이 시달린 사람들에게 경제 성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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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크 수감자들의 노동으로 건설된 백해-발트해 운하



어쩌면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남성 수감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 수감자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바로 성범죄이다.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등장하지는 않다. 몸수색 단계에서 여성 죄수들을 산부인과 의사에 앉게 했고, 수색을 하는 간수들이 산부인과 의사와 달리 모욕적이고 거칠게 행동했다는 언급만 나온다. 그러나 굴라크에 수감된 여성이 성범죄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음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굴라크 내부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한 김남섭 교수의 논문 <스탈린 시대의 소련 강제수용소 연구 : 수감자들을 둘러싼 수용소 내의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2009)>에는 여성 수감자에 대한 언급이 있다. 시기에 따라 변화하지만 대략 5~20%를 차지하던 여성 수감자가 처한 현실은 남성 수감자에 비해 처참했다.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체포된 남편을 따라 체포되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이혼한 부인도 전 남편의 범죄 행위를 미리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바로 성범죄에 대한 노출이다. 여성 수감자는 수용소 직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남성 수감자에게까지 성적 착취를 당했다고 한다. 수용소 구성원 사이의 위계구조와 여성 수감자의 위치를 고려해볼 때, 그들이 어떤 위험에 노출되었는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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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중



영화에서는 굴라크의 증언과 함께 굴라크에서 풀려나고 몇 십 년이 지난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이 묘사된다. 석방 이후 솔제니친의 조수로 일한 사람, 더 이상 흑건과 백건이 구분되지 않는 피아노 건반을 더듬으며 연주하는 이, 다른 희생자를 위해 탄원서를 보내며 살아온 삶들. 그들의 뒷모습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모습이 보인다. 점점 사라져가는 생존자의 목소리는 관광객이 모여든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푸틴 분장을 한 사람의 모습과 대비된다. 어떤 목소리는 희미해지고, 어떤 목소리는 힘을 얻는다.


영화 상영 후 진행된 감독과의 GV 시간에 마리안나 야로프스카야 감독은 굴라크 희생자에 대한 현대 러시아인의 의식 부족을 지적했다. 동시에 그는 한국 관객에게 북한에 위치한 노동 수용소(소련의 굴라크를 복제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질문했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실을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이 영화에서 지적하고 있는 현실이 그들만의 일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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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GV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은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말로 시작한다.



체포를 한 러시아와

체포를 당한 러시아

두 개의 러시아가

서로를 마주 볼 것이다.


- 안나 아흐마토바



스탈린이 사망하고, 굴라크 수감자들이 풀려나기 시작한 이후 러시아인들은 두 개의 러시아를 마주해야 했다. 영화 속 한 생존자도 심문한 사람과 길거리에서 마주친 경험을 이야기한다. 나를 짓밟고 탄압한 자를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언젠가 우리에게도 두 개의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우리가 마주 볼 얼굴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지 지금부터라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영화 <굴라크 수용소의 여인들> 트레일러



[홍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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