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해로운 웃음들에 대한 선전포고 - "해나개즈비 : 나의 이야기" [사람]

글 입력 2019.08.0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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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최근까지 나에게 웃음은 긍정적인 것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왜 이런 말도 있지 않은가.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다.’ 이 외에도 웃음을 찬양하는 말들은 수도 없이 많다. 웃으면 복이 온다. 웃으면 다른 사람들이 좀 더 널 좋아할 것이다. 등등. 나는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퍼져있는 이 말들을 무조건 믿었고, 따라서 가급적이면 많이 웃어보려고 노력했다.


확실히 내가 웃지 않았을 때보다 웃었을 때 사람들은 날 더 좋아했다. 내 첫인상을 조금 무서워했던 친구들도, 나를 자주 놀리던 짓궂은 사람들도, 왜 맨날 죽상을 하고 다니냐고 구박했던 어른들도 내가 더 잘 웃을 때마다 날 조금 더 편해했다.


그런데 그들이 나를 편해할 때마다. 나는 점점 더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왜 그럴까. 싶었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 스탠딩 코미디쇼를 보게 되었다. <해나 개즈비 : 나의 이야기>다. 이 스탠딩 쇼를 보고 그제야 내 불편함의 원인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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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정말 재미있는 것을 보고서 눈물 빠지듯이 웃는 폭소, 뿌듯하거나 귀엽거나, 즐거운 것을 봤을 때 짓는 미소, 어이없을 때 짓는 실소,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짓는 웃음까지.

 

언젠가부터 내 웃음은 어색한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서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비하하거나, 함부로 재단하거나, 외모에 대해서 평가할 때 나는 화내는 대신 ‘하하...’하고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분위기에 따라서 ‘맞아요 맞아요 제가 좀 그렇죠’하고 적극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며 웃는 경우도 있었고 ‘아뇨 사실 전 이러기까지 해요!’라고 내가 더 오버해서 나를 깎아내려 다른 사람들의 웃음까지 유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긴장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에게 무례하게 굴 때, 보통은 그 무례는 장난이나 농담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런데도 그 말은 무례를 함의하고 있음으로 그 자리에 그리고 내 마음속에 생기는 탄탄한 긴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 긴장은 나를 초조하게 한다. 상대방의 말에 대한 내 대답이 그 자리의 다음 분위기를 결정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그 사람의 무례한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벌컥 화라도 내거나 웃지 않고 기분 나쁜 티를 낸다면 나는 곧 ‘예민한 사람’ ‘사회생활을 잘 못 하는 사람’이 되기에 십상임을. 나는 이미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에 나에게 닥칠 때마다 그저 웃었고, 나를 자학하며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냈다. 그렇게 하면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꽤 쉽게 다른 사람들의 특이한 외모를, 취약점을 지적했다. 그렇게 하면 쉽게 긴장 대신 웃음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게 어떤 종류의 웃음이든 말이다.


*


<해나개즈비: 나의 이야기>는 내가 위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불편한 웃음들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특히 그녀는 보수적인 사회의 성별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 레즈비언 개그우먼이라는 비주류의 존재로서 긴장을 피하고자 만들었던 코미디, 웃음들에 대해 고백한다. 이는 우리에게 웃음과 성별 이분법, 계급에 대한 깊은 고찰과 반성을 할 수 있는 장을 만든다.

 


“비주류에 속한 사람의 자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시나요? 겸손이 아니에요. 수치심이죠. 자신을 낮춰서 발언할 기회를 얻는 거니까요.“


 

더불어 해나개즈비는 이 쇼에서 다시는 자신을 자학하는 개그를 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한다. 이내 코미디 쇼에서, 수많은 관객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화까지 낸다.



"이런 긴장이 조성됐지만 저는 웃음으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모두가 이 긴장을 직접 느껴봐야 해요 이 고통은 소위 비정상인 사람들이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하고 불편했다. 코미디 쇼지만, 더는 웃기지 않는다. 대신 불편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그녀가 내는 화는 응당 내야 하는 분노다.

 

그 불편함은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화를 내야 하는-상황에서 웃음으로 도망쳐 나왔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상처 주었는지를 일깨워주는 경종과 같았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불편해야 한다. 무례함에는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분노가 뒤따라야 한다. 지금까지의 웃음들이 얼마나 해로웠는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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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웃음으로 상대방의 무례를 무마하는 것이 일종의 ‘미덕’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에서, 호주출신의 여성 레즈비언이 하는 이 짧고 이질적-이라고 느껴지는-인 코미디쇼는 매우 유의미하다.


앞에 있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의 잠깐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 내가 힘들기 싫어서, 고지식하고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웃지 않은 농담에 웃어봤다면 공감할 쇼이며,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조금은 부적절한 농담을 해봤다면, 다른 사람들의 외모나 환경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 해봤다면, 사람들과 만남을 끝내고 나서 집에 오는 길에 자신의 농담에 대해서 후회했다면 꼭 봐야할 쇼다.

 

웃음에 대한 고찰뿐만 아니라 예술사, 퀴어 문화, 성차별, 기존의 코미디쇼들에 대한 해나개즈비의 고찰도 엿 볼 있으니 관심이 조금이라도 가는 사람은 꼭 한번 시청하기를 권한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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