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바딤 콜로덴코 & 알레나 바에바 듀오 콘서트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글 입력 2019.05.0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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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공연을 보기 전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잠실역에 일찍 도착해서 저녁도 먹고 심지어는 카페에서 글도 쓰려던 야심 찬 계획과는 달리 공연 시작 10분 전에야 콘서트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앉을 자리 하나 없는 로비에서 샌드위치를 욱여넣어야 했다. 공연장에 도착하기까지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광활한 제2 롯데월드를 40분간 헤매야 했던 과정은 너무 구구절절한 이야기라 일일이 언급하기도 벅차다.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픈 충동이 턱밑까지 차는 상황에서 나는 그렇게, 바딤 콜로덴코의 월광을 들었다.


이왕 솔직해진 김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월광을 듣자마자 잠이 쏟아졌다. 그러나 이 무례한 졸음은 지루함에서 기인하는 산소 부족의 수면이 아니다. 이 졸음은, 세상의 무서움을 아직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겼을 때 밀려오는 태고적 수면에 가깝다. 독일의 음악 비평가이자 시인인 루트비히 렐슈타프는 베토벤의 월광을 "달빛이 비치는 루체른 호수의 물결에 흔들리는 작은 배와 같다"라고 평했다.


월광이 주는 어두운 물결의 일렁임은 양수의 편안한 출렁임과 궤를 같이한다. 9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모차르트 태교(태아에게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려주면 아이의 지능이 높아진다는 속설)는 과학적으로 거짓임이 드러났지만, 클래식에는 분명 인간의 원형을 건드리는 편안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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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작곡가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월광은 가장 대중적인 곡이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 본인은 클래식계의 빌보드 1위인 이 곡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는데, 귓병의 급속한 악화로 청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월광을 작곡했기 때문이다. 작곡가라는 직업은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완성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월광의 악보 속 음표는 그 자체로 예술이지만, 이것이 전시될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악기와 연주자라는 매개체가 필요하다. 이것은 다른 어떤 장르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현상이다. 희곡마저도 배우와 무대 없이 독자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문제는 곡의 가치 또한 매개체의 실력에 따라 결정된다는 데 있다. 물론 작곡을 전공한 사람들이야 악보만 보고도 이 곡이 훌륭한 곡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겠지만 대중들의 입장에선 연주자가 형편없으면 곡마저 형편없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말은 반대로, 하나의 악보로 연주자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수십 개의 다른 작품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작곡이라는 작업이 갖는 태생적 한계는 작곡가에게 끊임없는 고통의 굴레이자 무한한 축복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토벤의 영혼이 바딤 콜로덴코의 연주를 보았다면 졸음이 밀려오지 않았을까. 서투른 연주에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마음 편히 자신이 만든 자궁으로 들어가 태고의 수면에 몸을 맡기지 않았을까. 나는 바딤의 연주가 다른 연주자에 비해 어떤 부분이 훌륭하고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유명 음악 비평가가 느꼈던 바를 클래식 못알에게도 비슷하게 전달했다면 그 자체로 제 몫을 훌륭히 해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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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바딤 콜로덴코



바이올린에 관해선 그래도 할 말이 좀 있는 편이다. 비록 코흘리개 시절 1년 동안 배워본 게 전부지만, 적어도 바이올린이 쇄골과 닿는 부분이 얼마나 아픈지, 팔의 각도가 흐트러지지 않고 활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노력이 필요한지는 안다. 피아노만큼 흔한 악기가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전문가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 고요한 연주장 속에서 더 크게 경탄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이것은 거의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운데, 그래도 수백 번은 손에 쥐었을 내 바이올린에서는 한 번도 나지 않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특히 알레그로로 빠르게 연주하는 와중에도 절대 흐트러지지 않는 알레나의 팔은 경탄을 넘어 경이의 대상이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침대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에도 어울리는 광고 문구다.


개인적으로는 바이올린보다는 소리가 중후한 첼로나 비올라를 좋아하는 편이다. 딱히 바이올린이 싫다기보다는 내가 연주할 때마다 바이올린의 가장 높은 음계인 미 음계에서 항상 듣기 싫은 소리가 났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활에 송진을 발라도, 아무리 팔에 힘을 빼고 연주를 해도 귀를 찢는 듯한 파열음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공연 셋 리스트에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봄이 올라와 있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높고 빠른 음들이 휘몰아치는 연주는 내가 현악기에서 원하는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하자마자 알레나는 내 건방과 독선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클래식에서 화려한 퍼포먼스는 그다지 주목받을 만한 것이 아니지만, 확실히 콘서트 홀에서 연주를 직접 보는 것과 집에서 디지털화된 음원을 듣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 평소 짐노페디나 (드뷔시의) 달빛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공연장에서만큼은 빠르고 기교 넘치는 곡을 들어보길 추천한다. 거장의 음악에 취해 춤추는 활의 모습과 두 연주자 사이에서 오가는 미묘한 눈빛, 그리고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관중들까지. 이 모든 것은 아다지오(Adagio: 매우 느리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알레그로(Allegro: 빠르게)만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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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엘레나 바에바



가장 좋아하는 악기이자 유이(有二)하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기회다. 무엇보다 세계 정상급 연주자의 공연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어 영광이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집 밖을 나가지 않고도 삶의 대부분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실재'가 주는 현실의 울림은 절대 디지털화될 수 없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바딤과 알레나가 건넨 현실의 울림과 공명하는 중이다.



[김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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