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기타]

본격 독서 덕질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글 입력 2018.12.0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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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수상한 웹툰이 하나 있다.


병맛 혹은 천재. 이창현과 유희는 웹툰 마니아라면 이미 익숙하게 접했을 <에이스 하이>와 <빅토리아처럼 감아차라>를 만들어낸 콤비다. 두 작품 모두 '예측 불허의', '참신한', '덕후를 위한' 등등의 수식어를 달고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는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두 사람이 최근 10월 25일 완결 지은 따끈따끈한 작품으로, 밀리터리 덕후 만화와 축구 덕후 만화에 이은,


독서 덕후를 위한 웹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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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은 노란 머리의 어딘가 순진해 보이는 남자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닉네임 노마드. 주인공 냄새를 잔뜩 풍기며 등장한 노마드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새로운 사람들과 나누게 될 대화에 잔뜩 들떠있다. 독서 모임의 멤버들을 상상해본다. 왠지 얌전할 것 같고, 말수가 적을 것 같고, 어딘가 괴짜 같은 사람들도 존재할 것 같고. 상상만으로도 노마드는 기대에 부푼다.


하지만 노마드의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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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서를 읽는 (심지어 자기 계발을 자기 개발로 알고 있는) 노마드는 단숨에 모임에서 추방당한다. 독서 중독자들은 자기 계발서에 냉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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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날이 첫 모임인 닉네임 경찰은 노마드의 추방을 보고 조금 긴장한다. 하지만 솔직하게 밀고 나가기로 결정한 경찰. 그리고 그의 대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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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때와 달리 비교적 온화한 반응을 보이는 독서 중독자들. 그들은 경찰을 자신들의 멤버로 수용하기로 결정한다. '자기 계발서'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독서 중독자들의 이중적인 온도 차이를, 작가는 코믹하면서도 공감을 자아내도록 그려낸다. 이들은 이후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거치며 책 덕후로서 '간지'와 '허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한다. 하지만 결코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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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중독자들의 범상치 않은 프로필. 위 다섯명의 독서 중독자들과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예티, 소설을 쓰는 로렌스, 자기 계발서 인간 노마드 등이 합세하여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덕후들의 독서와 관련한 다양한 시각과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책을 너무도 사랑하는, 책에 의해 책을 위해 살아가는 이 독서인들은 사회 부적응자처럼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 모습이 독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도대체 저들이 손에 쥐고 있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그 책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아직 읽어보지 못한 책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기도 하고, 그들이 전수하는 책 고르기 꿀팁을 활용하여 새로운 보석을 발견해보고 싶기도 하고. 갖은 이유로 이 웹툰은 결국 독서를 부추긴다. 그러니까 이 만화, 아이러니하게도 독서를 장려한다.


독서를 장려하는 웹툰이라니. 이 정체성 묘한 만화를 읽기 전, 미리 알아두면 더 좋을 매력 포인트 4개를 소개한다.




매력1. 독서 꿀팁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챕터의 구분이 없지만, 독서와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두고 상당히 많은 대화들을 쏟아낸다. 첫 번째 주제는 '첫인상으로 책 고르기'. 독서 중독자들은 책날개만 보고도 좋은 책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구구절절한 저자 소개, 혹은 저자 소개보다 긴 역자 소개를 실은 책들은 재고의 여지없이 그들에게 무시당한다. 닉네임 사자는 한술 더 떠서  '저자명'보다 '출판사명'이 크게 인쇄된 책들은 불매하던 때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의하는 듯 눈시울을 붉히며 과거를 회상하는 멤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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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꿀팁으로 슈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확실한 방법인 '목차 확인'을 제시한다. 목차를 봤는데도 전체적인 구성이나 전개 방식을 가늠하기 어려운 책은 기본이 되지 않은 책이므로 패스해도 좋다는 것이 그의 주장. 사자는 책 제목이랑 목차를 원서와 대조해, 출판사가 임의로 수정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는 것도 좋은 책 고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 밖에도 그들은 소설만을 읽는 독서활동의 위험성이라든가, 베스트셀러, 좋은 서문 구별하기, 주석 무시하기, 읽을 책 고르는 법, 책 막 다루기, 완독에 집착하지 않기 등 온갖 독서 취향과 스킬을 난사하며 독자들을 무릎 꿇게 만든다.




매력 2. 현실적인 독서 중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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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들의 수준 높은 대화에도 위기는 찾아온다. 슈가 무심결에 준비해 온 디저트 <마들렌>이 바로 그 위기의 시발점. 보통의 사람들에게 마들렌은 그저 달콤한 프랑스 디저트에 불과하겠지만, 독서 중독자들에게 마들렌이란 곧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그 아무리 독서 중독자라 할지라도 그 모든 책을 다 읽어볼 수는 없는 노릇. 그간의 독서 내공으로 그들은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일정 수준의 대화가 가능하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은 영 할 말이 없다.


이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독서 중독자들은 각자 머리를 굴린다. 선생은 프로이트를 거론하며 대화의 흐름을 바꿔보려 하고, 사자는 생제르맹을 드나드는 등장인물을 언급하며 생제르맹의 축구팀으로 화제를 전환하려 하며, 고슬링은 이때를 위해 준비해둔 인용문을 다시 한 번 복기한다. (결국 어떻게 됐는지는 웹툰 참조.)


독서 중독자들은 결국 독서 덕후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우스꽝스러운 면들까지도 이 웹툰은 여과 없이 그려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화제가 나왔을 때 자신의 부족함을 들키지 않고 넘어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멤버들의 모습이라든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다른 사람이 아는 체를 해버렸을 때의 불쾌감 등,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은 독서 중독자들의 지적 허세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다.




매력 3. 캐릭터들의 디테일



웹툰의 주인공들은 모두 '독서 중독자'라는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 속한 개인이지만, 각자의 서사가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닉네임 경찰이다. 경찰의 캐릭터는 영화 <무간도>를 패러디하여 구체화되었다. 다리파에 스파이로서 생활하고 있는 경찰의 처지는 웹툰 곳곳에서 유머와 (간간이) 묘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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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앞에 두고도 반납 독촉 문자에 망설임 없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경찰. 그는 진정한 독서인이다.....)


또한 첫 화에서 주인공 포스를 내며 등장했다가 비참하게 사라진 노마드 역시 애정 가는 캐릭터 중 하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기를 쓰고, 긍정의 한 줄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자기 계발서 인간 노마드는 독서 중독자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한다. 1500페이지가 넘는  『지중해』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를 독파하는 노마드의 눈물겨운 노력의 끝은 어떻게 될지 웹툰을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한다.




매력 마지막. 숨겨진 독서 중독자들 - 댓글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의 숨겨진 공신은 다름 아닌 댓글들이다. '독서 덕후'라는 웹툰의 특성 때문일까 이 웹툰의 독자층은 역시나 독서 중독자들, 혹은 독서 중독자를 꿈꾸는 사람들이다. 댓글 창은 올바른 맞춤법에 비문 없는 문장들로 가득하며, 웹툰에서 언급한 책의 비하인드스토리부터 책 추천, 그리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매 에피소드마다 댓글 속 진짜 독서 중독자들의 생생한 후기를 읽어보는 것 역시 이 웹툰을 더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꿀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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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이라는 형식으로 전하는 '책' 이야기라는 점에서부터 이 웹툰은 평범하지가 않다. 프롤로그에서 이들은 강유원의 『책과 세계』의 일부를 인용하여 말한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퍼덕퍼덕 움직이는 세계가 있으니 죽어 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을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만 뜯어 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어쩌면 이 웹툰은 병든 인간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자기반성을 밥 먹듯 일삼고, 위장에 탈 난 사자처럼 책만 읽어대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겐 사회 부적응자처럼 비치며, 누구에게는 영웅처럼 여겨지고, 또 어디선가 자기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진지하면서도 어렵지 않고, 웃기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웹툰. 한 번쯤 내가 독서에 '중독'된 건 아닐까 고민해본 사람이라면, 독서에 한 번쯤 중독되고픈 사람이라면, 추천하고 싶은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이다. 현재 다음 웹툰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으며 단행본 역시 구매 가능하다.



P.S. 저자는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 (라티오 출판사) 에서 이 웹툰의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또한 사정 상 '번역' 관련한 에피소드를 다루지 못해 아쉬움을 토로하며 박상익의  『번역청을 설립하라』 (도서출판 유유)를 추천했으니 관심 있는 독서 중독자들은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아래는 웹툰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에서

언급한 책 목록이다.



1화
슈테판 츠바이크  『에라스무스 평전』


4화
마이클 하워드,  『제1차세계대전』


5화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E.H. 카  『역사란 무엇인가』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화
칼 쇼르스케, 『세기말 빈』
션 매커보이,  『셰익스피어 깊이 읽기』
김학이,  『나치즘과 동성애』


9화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11화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조나단 윌슨,  『축구철학의 역사』


12화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3화
페르낭 브로덴  『지중해』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윌리엄 맥닐,  『세계의 역사』
지오프리 파커,  『아틀라스 세계사』


14화
올리퍼 푀치,  『밤베르크의 늑대인간』
D.H. 로렌스  『사랑에 빠진 여인들』
존 던  『민주주의의 수수께끼』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15화
한스 J. 모겐소  『과학적 인간과 권력정치』
귀스타브 플로베르, 『부바르와 페퀴셰』
트리스트럼 헌트,  『엥겔스 평전』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파우스트』
카플로 M. 치폴라,  『시계와 문명』
쇠얀 키에르케고어,  『죽음에 이르는 병』
게르하르트 L. 와인버그  『제2차세계대전』
허먼 멜빌  『모비 딕』


16화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히라노 게이치로,  『일식』


18화
존 르 카레
그레이엄 그린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19화
김일,  『굿바이 김일』


20화
셰익스피어,  『맥베스』  『햄릿』  『오셀로』 (아침이슬, 김정환 역)


22화
폴 카트리지,  『스파르타 이야기』
샬롯 히긴즈,  『한 권으로 읽는 그리스 고전』


23화
토마스만,  『마의 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5화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프란츠 카프카,  『성』


마지막 화
알베르토 망구엘,  『독서의 역사』
로저 크롤리,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날』


에필로그
강유원,  『책과 세계』
에드워드 파머 톰슨,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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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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