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흙 아래 날개치는 흰개미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 리뷰
글 입력 2018.11.19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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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올 듯 말 듯 하게 흐린 하늘, 어딘가 싸늘해진 바람을 느끼며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딘가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내부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한 쪽 끝에는 문이 하나, 한 쪽 끝에는 대청마루가 하나. 무대의 가운데에는 평상과 흙더미. 흙더미를 정면에 두고 객석에 앉으면서 도대체 어떤 무대가 펼쳐질지 예상이 되지 않아 두려우면서도 설렜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것은 바닥의 색뿐, 발만 뻗으면 바로 무대 안이었다.


불은 꺼졌고, 극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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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개미



극은 연구원 ‘에밀리아’의 발표로 시작된다. 극이 시작하자마자 ‘아, 어렵겠다’ 싶었다. ‘페어리 서클’ ‘흰개미’와 같은 낯선 단어들이 바닥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흰개미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왜 흰개미야?’ ‘흰개미는 도대체 뭔데?’ ‘이건 강의일까?’라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할 무렵, 본격적인 갈등이 펼쳐졌다.


공연을 보는 내내 ‘너는 얼마나 다른가?’라고 묻게 되었다. 생각할 것도 많고, 고민할 것도 많았던 연극이라 기억나는 점을 간추려 간단히 적어보려고 한다.




너는 얼마나 다른가?



극심한 가뭄 속 유일하게 푸름을 유지하는 곳. 마을 속에 있지만 마을과는 다른 집. 이 작다면 작은 공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갈등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갈등은 죽은 아버지와 산 아들의 갈등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대형교회와 아버지가 저지른 부정을 함께 물려받은 ‘석필’은 이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끊임없이 아버지와 다르다고, 아버지가 저지른 일을 왜 내가 해결해야 하냐며 울부짖지만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환영을 본다. 현재를 사는 석필은 지나간 과거인 ‘태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나, 결국 그도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임이 밝혀진다. “내가 다 해결한다니까요!”라고 외치고 “보상할게요! 내가 보상해드린다니까요!”라고 소리치던 석필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고 어떤 보상도 줄 수 없는 나약한 인물일 뿐이었다.


흰개미 때문에 무너지는 자신의 집을 고칠 수도 없고,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끊을 수도 없으며, 책임지고 대형 교회를 이끌 수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은 아마 그가 지니고 있던 필연적인 나약함에 대해 내가 일부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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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무게



가장 마음이 쓰인 캐릭터는 ‘지한’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한’에게 몰입해 그녀의 입장에서 모든 상황을 바라보게 되었다. 태식과 석필이 기억하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어떤 날을 지한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자신이 어떻게 이 높은 문 앞에 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는지, 석필의 아버지가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석필은 그런 상황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며 무엇을 했는지. 그런 지한을 앞에 두고 석필은 ‘나는 모릅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라고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지한이 눈물 범벅이 되어서도 덤덤하게 툭툭 내뱉는 대사들에 내가 화가 나고 눈물이 났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았다는 것, 혈육이라는 이유로 눈감아 주었다는 것, 다시 한 번 기회가 왔을 때 외면했다는 것, 그것이 침묵의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리아와 지한의 발언은 특별하다. 그만하고 나가라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흰개미에 대해 설명하는 에밀리아와 힘들고 아픈 기억을 꿋꿋하게 꺼내는 지한은 다르지만 어딘가 닮아 있다.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고 긍정적으로 밝히는 모습, 흰개미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흰개미가 여기 사는 것은 환경이 만들어졌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고택의 높은 벽에 금을 내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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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무너진다



막힌 우물 밑 모여든 수천 혹은 수만 마리 흰개미의 존재를 가장 먼저 믿은 것은 석필도, 현숙도 아닌 지한이다. 정작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부정하던 흰개미의 존재를 외부인인 지한이 가장 먼저 듣고 믿었다는 것은 그 집과 집에 살던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주변을 돌보지 않았는지를 보여준다.


흰개미의 존재를 알게 된 지한은 마구 뛰며 땅을 밟는다. ‘무너져!’ ‘무너져!’라고 외치면서. 처절했고, 처절한 만큼 저릿했고, 나중에는 속이 시원했다. 내심 속으로는 더 해도 된다며 응원하고 있었다. 밟고 있는 것은 땅이지만, 지한이 무너뜨리고 싶었던 것은 석필과 태식, 그리고 그 집을 찾아올 수 있게 되기까지 그녀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에밀리아와 지한이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었다. 에밀리아는 지한을 안아주면서 ‘당신은 용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 그 장면이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우물을 막고, 마을을 모두 사막으로 만들고, 홀로 고고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에는 흰개미로 인해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는 고택은 주변의 고통을 외면하고 얻는 명성과 부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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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에서 흙이 후드득 떨어지고 극은 막을 내렸다. 생각할 거리도 많고, 사람마다 다른  해석이 개입될 여지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 공연은 리뷰를 쓸 때 조금 더 조심스러웠다. 글을 쓰면서도, 글을 쓰고 나서도 이런저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던 공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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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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