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인생 기억을 모집합니다

글 입력 2018.10.27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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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기억을 모으는 중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은 기분 나쁜 기억보다 행복한 기억이 압도적으로 많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난 지금까지 살면서 본래 음식을 싫어하는, 딱히 안 즐길 수는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건강을 위해 삼시세끼를 챙겨먹어야 되는 건 따분한 공부/업무 시간에서 탈출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며 달콤한 간식은 지쳐 쓰러질 것 같던 사람도 정상궤도에 올려놓는 기적을 만든다.


음식은 여러 차원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맛도 맛이지만 음식을 먹기 위해 요리하는 과정과 음식을 함께 먹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감정 등등... 음식이 일상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커다란 행복 중 하나인 건 틀림없다. 하지만 일상 속에 너무나 깊게 침투해있기에 오히려 음식이 특별함을 갖는 건 생각보다 힘들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인생 기억”을 모으고 있다. 좀 오글거릴 수도 있지만, 인생 기억을 모아야지! 라는 결심을 하고 모으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간이 정말 오래 흘렀는데도 생생히 기억나는 인생의 한 장면을 “인생 기억”이라고 부르기로 정한 것이다. 이러한 기억들은 당시의 감정이 굉장히 강렬했거나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선정된 기억들로 나뉘는데 후자는 주로 따뜻하고 아련한 기억들이다. 후자의 기억들 중,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기억이자 음식과 관련된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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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면 커피를 먹곤 했지



앞에서 설명한 것만 보면 뭔가 대단한 기억일 것 같지만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기억은 사실 정말 소소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한 장면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고등학교 3학년 때 거의 매일 먹던 바닐라라떼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고3이란 시간이 기억에 부리는 마법은 정말 신기하다.) 여름방학 전, 적당한 더운 날씨, 입시가 코앞에 닥친 건 아니라 적당히 공부를 하고 적당히 스트레스를 받던 시기였다. 고3이라 자습시간이 늘어났는데 난 수업을 듣는 것보다 자습을 하는 것이 더 좋았다. 정해진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을 따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학교의 시간을 무시하고 스스로 무얼 할지 정하고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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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자습시간은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수업 시간보다 머리를 더 많이 쓰는 건지 지치기 쉬워 마지막 교시까지 끝나면 피곤하고 졸릴 수밖에 없는데 나는 이런 몽롱한 상태를 좀비상태라고 불렀다. 좀비상태가 되어 친구를 쳐다보면 친구도 너무나 진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어 웃음이 났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학교를 나서 근처의 카페에 가서 바닐라라떼를 주문했다. 친구도 항상 바닐라라떼를 먹었다. 나 때문에 커피를 마시게 됐는데 내가 매번 바닐라라떼만 먹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야자가 의무가 아니었기에 수업을 마친 학교는 꽤 조용했다. 카페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봤던 석양이 지기 직전의 하늘, 가끔 불던 바람이 우리의 모습과 함께 그려지며 감성을 자극한다.


좀비상태에선 말없이 터덜터덜 걸었지만 그런 피곤함이 왠지 뿌듯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항상 말없이 카페로 향했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오늘도 수고했어, 같은 수많은 감정이 오고갔던 것 같다. 카페 사장님은 컵 홀더에 굵은 펜으로 문구를 직접 써주셨다. 남은 하루도 파이팅! 같은 응원 문구였는데 매일 달랐기에 오늘은 뭐라고 써주실지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바닐라라떼로 당 충전을 하고 나면 우리는 갑자기 활기차져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얘기와 함께 박장대소를 하며 학교로 돌아왔다. 지금 그 친구를 만나거나 학교 주변을 지나거나 그 카페를 다시 가면 이 장면이 꼭 생각난다. 친구와 함께 커피를 먹는 기억은 인생 기억이라 하기에 너무 소소해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몽글몽글함과 함께 내 학창시절 야자를 대표하는 장면이다. 커피라면 질리도록 먹었는데 이 장면이 이토록 깊게 남은 건 친구와 서로의 상황에 대한 공감과 응원을 커피 한 잔으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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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은 커피는 바닐라라떼지만, 커피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정말 많고 나에게 있어 커피는 꼭 필요한, 매우 중요한 일상의 한 부분이다. 행복한 카페인 중독자로서 하루에 한 번 커피(주로 카페라떼, 힘들면 바닐라라떼)를 마시는 건 소확행 그 자체다. 요즘은 카페 알바를 하며 커피를 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서 기쁘다. 손님들이 시키는 플랫화이트(카페라떼보다 우유가 반 정도 적게 들어가는 커피) 맛이 궁금해서 먹어 본 후에 플랫화이트에도 눈을 뜨게 됐다. 커피가 내게 하루에 한 번 행복을 준다면 아트인사이트는 일주일에 한 번, 문화초대를 많이 향유할 땐 세 번까지 나를 찾아왔다. 커피처럼 단순한 행복은 아니었다.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서를 작성할 때가 생각난다. 질문 중에 ‘문화예술이란 무엇인가’가 제일 쓰기 어려웠던 것 같다. 난 주로 교수님의 의식의 흐름으로 진행되는 유럽미술과 음악 시간에 답변을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멍을 때렸을 수업시간인데 교수님의 연륜 넘치는 강의를 듣다가 문득 답변이 떠올라서 기뻤던 기억이 난다. 사실 에디터 활동을 하면서 주제를 정하는 것도 어려웠고 쓰는 데 글을 쓰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을 필요한 일들이 다 그렇듯 돌이켜보면 얻은 것들이 정말 많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일주일에 하루,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정말 필요하면서도 따로 시간을 내서 가지기엔 어려운 시간이다. 자발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이런 시간을 갖는 사람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감을 잡기에 너무 추상적이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적인 일이 너무 바빠 이런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트인사이트에선 ‘예술’이라는 넓은 주제 하나를 던져주고 무엇이든 갖고 오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이 듬뿍 담긴 자신만의 예술을 가지고 온다. 예술이 높고 고매한 것이라는 편견이 깨진 지는 오래다.


이번 주엔 뭘 쓸지 고민하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더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지원하면서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얻고자 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아트인사이트 활동이 인생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지는 사실 좀 더 지켜봐야한다. 아무리 강렬한 기억이라도 시간이 흘러 잊혀진다면 인생 기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닐라라떼의 기억도 당시에는 이렇게 계속 생각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에디터 활동을 하며 남은 몇 가지 소중한 기억들이 있는데 이 기억들이 꼭 나에게 오랫동안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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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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