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는 이런 기분이에요 - 빈첸과 우원재에게 보내는 헌사 [음악]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의 사회
글 입력 2018.07.13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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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위치는 합정역 7번 출구 도보 4분 정도 거리 지하방 대각선 방향에는 메세나 폴리스 거기 사는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 신호를 기다리며 바라보면 괜시리 허무한 느낌이 들고 여러 감정이 오가요”

“오늘은 엄마 원재 괜찮아 라는 전화통활 엿들었던 내 기분은 아시나요 근데 있잖아 그떄 그 유명의사가 내게 입원하라 할 때 누나는 왜 날 그리 말렸나요 근데 그것도 못 버텨 사라진 날 울면서 쫓아온 누나 신발은 왜 짝짝이었나요”

“엄마 9시면 자던 분이 그때 이후로 꼭 새벽까지 버티는 게 혹시 나 때문인가요, 아 그럼 아빠 요즘 전화할 때마다 아들 미안하다 하시는데 씨발 나때문인가요”

“내가 존나 약해 보이고 어린애 같은 거 알아서 속으로 삼키려 하는데 그것마저 아는 엄마는 어떤 기분이신가요”

*

검질긴 감정이 있다. 가슴 속에서부터 무겁게 부풀어올라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다양한 모습의 감정들. 이 감정은 역사 속에서 유령처럼 살아남아 다양한 이름으로 우리를 사로잡았다. 철학자 김동규는 멜랑콜리라고 파악했고 그 누군가는 가슴에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으며 나는 하이데거의 말마따나 엄습해오는 불안에 존재가 뒤틀리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어두운 기분은 마치 마음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지금의 나를 답답하게 만들고 기저 속에서 어떤 것을 낳아 움트게 한다.

우원재의 첫 등장을 기억한다. 화려함을 보여주려 노력하던 수많은 사람들 속 혼자만의 고통을 뱉어내던 모습. 고통이 자연스러운 이 사람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를 신기해하면서도 과연 “그가 정말 그 정도로 고통스러울까?”라고 생각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쇼미더머니가 진행되면서 그의 어두운 면들을 음악으로 풀어내고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스스로 조금씩 덜어내는 모습을 봤고 어느새 밝아진 그의 모습에 일단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 발표된 곡(paranoid, 과거에게)들이 타인에게 들려주는 형식의 곡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곡들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시차’만큼 유명해지지 못했지만 흐트러진 많은 것들을 주워담는 것을 보며 그리고 그대들의 기분을 묻는 그의 가사에서 새로운 예술가의 탄생을, 앞으로를 기대하게 했다.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는 다행히도 고등학생인 빈첸(이병재)의 감성으로 시작한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날 것의 감정을 면면히 드러내며 비교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커튼 같이 드리워져 있던 장막을 걷어내어 사람들 앞에 나와 섬은 사랑 받고 싶음에 타인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며 마음을 흔드는 것들은 매번 덜어내고 잊어가기 바빴는데 그는 이렇게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담담한 비교를 통해 물어주었다. 아득한 감정들은 어느새 희미해져만 가는데 빈첸은 우리가 그리고 내가 10대였을 때 가졌던 날 것 그대로의 감정들을 그리고 지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었다. 그림 그리듯 보여주는 우원재의 쓰라린 침울함은 이 곡의 상황과 무게를 한 층 더 깊어진 곳으로 데려가 주었고 날카로움에도 발톱의 상처가 선명한 빈첸의 분노는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지 않았다.


빈첸 원재.jpg

빈첸, 이병재 (좌), 우원재 (우) 


사람은 눈물과 슬픔을 자아내는 고유한 지점이 있다. 누구는 같은 노래에 발 맞추어 뛰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구는 순수히 터져나오는 어린 아이들의 목소리에서, 누구는 모든 것을 불식시키는 헌신적인 사랑에서 슬픔을 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슬픔은 가족에 관한 것, 그 중에서도 엄마에 대한 것이다. 혁오의 노래 ‘톰보이’도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던 이유는 청춘의 슬픔을 꼬집은 것과 동시에 “난 엄마가 늘 베푼 사랑이 어색해 그래서 그런걸까 늘 어렵다니까”, “난 지금 행복해 그래서 불안해” 같이 사그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의 시선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빈첸과 우원재는 이렇듯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슬픔과 우울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금 더 기민하고 예민하게 감정을 풀어내고 사회적 감수성을 끌어올렸다.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해야하는 또 예술가이기에 할 수 있는 정치의 영역을 보여준 것이다. 슬퍼야 할 때 슬퍼해야 하고, 불편해야 할 때 불편할 수 있는 발언, 일상에 젖어 피로한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해 감정이 여실히 살아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빈첸과 우원재에게 보내는 답으로는 복잡 미묘한 감정과 우리가 놓여있는 상황을 꼽고 싶다. 현재 젊은 세대를 아우르는 단어는 하나가 추가 되었다. 그것은 바로 ‘세월호 세대’. 너무나 비극적이던 사건에 대해, 그들의 고통에 비견하면 감히 말하기 어려운 이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한다. 현대사에 큰 획을 그은 이 사건의 여파는 촛불항쟁으로 이어졌고 개개인의 삶에 속속들이 정치가 확장되었다. 역사에서나 마주하던 혁명과 시위로서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느끼게 되었다. 세월호 세대를 위한 정치철학으로서 “네가 나라다”를 말한 철학자 김상봉과 더불어 나라 답지 못했던 국가와 국가의 실체는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해서 화두를 던졌고 사람 한명 한명이 여실히 소중한 민주주의, 아나키즘에 대해 논하였다. 빈첸과 우원재의 감각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삶에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감정의 원인은 다른 이름과 형태로 우리 삶으로 들어왔으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했던 사건과 불의에 대해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예민한 감각을 유지하게 하였다. 보수의 몰락이 이뤄졌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가치를 행할 것인가, 나부터 실천하는 행동강령으로서 이 사회의 무너진 윤리와 정치가 다시금 세워지려 하고 있다. 더 이상 큰 사건으로서 존재하는 정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삶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와 가치에 놓여있는 우리네가 존재한다. 우원재와 이병재가 나의 기분이, 우리의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그대들과 같이 조용한 서울을 바라보고 무상한 감정에 취하며 그러나 당신들의 상처와 고통에 대해 여실히 함께하고 싶으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얼마만큼의 힘듦을 견뎌냈는지 쉽사리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다. 난민을 반대하고 고통에도 등수를 매기는 이 사회에 반하여 이 땅에 더 많은 평등과 사회적 자유를 가져올 것이며 진보를 위해 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비겁했고, 자기의 역사와 기존 사회의 가치를 뒤엎는 불편함을 감내 못하는지 잊지 않을 것이다.

우원재와 이병재의 노래가 하나의 장르로만 여겨지지 않길 원한다. 예술은 항상 사회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 것과 더불어 여러 장르 중 하나로 여겨지는 순간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다. 오늘의 내 감정을 위해 슬픈 곡을 듣는 정도의 선택의 자유는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회적 배경과 평등하지 못한 관계, 무게와 정도의 차이를 두고 야기하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 수많은 일반 사람들이 매주 토요일 저녁 박근혜의 퇴진을 위해 광장에 모였었지만 그들이 흩어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차별과 배제에 대해서 무관심해지는 것처럼 중요한 문제들이 구경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 드보르의 ‘스펙터클 사회’에서도 보여주었듯 정치인사를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것, 구원자를 기다리지 않는 것, 누군가를 이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연대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자본주의의 소비 촉진은 우리를 직업, 가정, 성별로 파편화시켰기에 소유의 체제가 들어섰고 그 체계를 보호하는 자기계발 따위를 강조한다. 자기를 바꾸는 것은 충분히 했으니 이제는 구조와 사회를 바꾸는 감각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거리를 두며 평가하고 몰입할 거리를 만들기에 익숙한 시각 문화는 자본과 권력에 충실해왔다. 구경거리를 만들지 않고 누군가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는 청각과 촉각에 충실한 자유와 공동체가 앞으로 마주해야 할 사회의 모습이다. 그 예로 일방향적인 시선의 콘서트 문화가 아니라 서로 부대끼고 춤추고 노는 다양한 방향의 페스티벌 문화로 이해할 수 있다. 힘들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어떠한 이념과 지식인 위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 스스로 한 명씩 인간에 대한 사랑과 약하고 가난한 자에 대한 도움으로 또 그러한 자유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대들은 어떤 기분이신가요”에 대한 나의 다른 답변은 “오늘도 어제와 비슷한 분노이길 바라고 사람 사이에 다른 가치가 들어오지 않는 당당함이길 원하며 사랑하기에 나를 죽일 수 있는 헌신이다.” 빈첸과 우원재가 고통스러워 했던 그 시간에 이 둘 보다 힘들지 않는 사람이 “너만 힘든가 나도 힘들다”하는 타인의 기만적인 발언이나 “나 하나 이 사회를 바꿀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희생했다”는 허영심과 비겁함으로 점철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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