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전기적 샤머니즘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글 입력 2016.02.29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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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적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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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적 샤머니즘


일자 : 2016.3.3 ~ 2016.3.12

시간 : 화 - 일 오후 2시 - 6시 (휴관일 : 월요일)

장소 :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난지전시실

티켓가격 : 무료




문의 : 02.308.1071





<상세정보>

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인 멜랑콜리의 주체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활동한 프랑스 사진작가 외젠 아제(Eugene Atget)는 대도시 파리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가 발품을 팔아서 찍은 이 '스트레이트'(straight) 사진 속에는 말 그대로 파리 곳곳의 모습이 정직하게 담겨있다. 그런데 벤야민의 지적처럼 이 진실한 광경을 담은 사진 속에는 왠지 모를 공허함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생뚱맞게도 그의 사진이 너무나도 정직하게 현실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현실에는 어떠한 이야기나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장소에 불과하다. 시끌벅적한 이야기와 치장이 제거되어 버린 현실의 사진 속의 이 공허한 도시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인 것이다. 그래서 아제의 이 지나치게 현실적인 사진은 오히려 공허하고 낯선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이다. 아제가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느낀 감정은 공허함이라는 덧없는 감정 이외에 묘한 심미적 매혹감이다. 이 역설적인 감정을 '멜랑콜리'(mélancolie) 또는 '우울'(spleen)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다. '멜랑콜리'는 현실의 덧없음에 대한 절망감과 동시에 그러한 덧없는 현실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복잡하고도 이중적인 감정이다.


김태은 작가가 작업을 통해서 보여주는 감수성은 한 마디로 이러한 '멜랑콜리'의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멜랑콜리의 감수성은 이전부터 현재까지 그의 작업을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에 전시된 작품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이번 전시를 위해서 새롭게 작업한 "주술적이거나 전기적인 저장장치'(2015)는 얼핏 보면 매우 엉뚱하고 심지어 장난감 같기도 한 공상적 장치처럼 여겨질 수 있다.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기차의 트랙이나 트랙 안에 있는 투명한 공과 같은 장치는 현실 공간이라기보다는 공상적인 토이랜드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달라진다. 트랙을 무한 반복 회전하는 기차는 투명공이 공기압을 유지하여 형태를 보존하기 위한 에너지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을 지닌다. 한편 투명공은 그 자체가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목적이다. 분명히 목적은 존재하는 듯하지만 사실상 그 목적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말할 수 없다. 목적은 있지만 그 목적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면 무의미한 것일뿐더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위들은 오히려 맹목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드러내며, 이 역설적인 상황이야말로 공허한 현실 그 자체이다. 여기서 우리는 김태은 작가의 작업이 매우 풍자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풍자를 넘어서 그 자체 현실을 지나칠 정도로 잔인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우리나라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들이 지닌 유사성을 발견한데서 착안한 것이다. 지역의 마스코트는 그 지역의 특수한 장소성을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를 획일성이 존재한다. 마치 서울시청을 포함하여 최근 전국 가지에 건축된 대규모 관공서 건축물이 획일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마스코트들에게서도 가족적 유사성이 나타난다. 작가는 이러한 획일화를 발생시키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다소 희화적인 방식으로 이 가족의 조상을 외계인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분명 이러한 힘은 존재하며 이러한 보이지 않는 힘이 마스코트와 같은 현실적 성과를 일으키는 원천이자 목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목적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주술적인 대상과도 같다. 온갖 과학적 성과나 기술을 총괄한 건축물이나 마스코트가 만들어진 목적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주술적 대상을 위한 것이다. 한 마디로 종교적인 맹목성인 셈이다. 과학과 종교는 맹목적인 관계를 통해서 서로 지탱한다. 작가 또한 맹목적이리만큼 무모하게 발품을 팔아서 직접 지역을 대표하는 마스코트들을 찾아 헤맨다. 아제가 그러하였듯이 현실의 공허함에 절망하면서도 그것에 묘한 미감적 희열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김태은 작가의 멜랑콜리적 감수성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단면일 것이다. 

-박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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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_주술적이거나 전기적인 저장장치_PVC 구, LED, 모터 레일, 공기압력센서,
마그네틱센서, 나무, 철, 필라멘트 전구_310×520×640cm_2015_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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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_주술적이거나 전기적인 저장장치_드로잉_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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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은_The History of Discover_포토몽타주, 캔버스에 프린트_28×90cm_2015


[나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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