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체홉, 여자를 읽다

글 입력 2015.03.28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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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꽃샘 추위를 앞두던 약간의 봄날. 덕수궁 옆 세실 극장에 발걸음을 했다. 광화문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까지 걷는 걸 좋아해서, 세실 극장으로 가는 길도 마냥 좋았다. 그리고 체홉이었다.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종종 이름을 듣게 되는 체홉. 체홉을 단편으로 접하게 되어 그의 단편을 각색한 연극이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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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의 옴니버스의 첫 무대는 ‘약사의 아내’였다. 배우의 입을 통해 ‘벌써 세 번이나 자리에 누웠으나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지 모른다. 마음이 답답하고 따분해서 화가 난다. 심지어 너무 화가 나서 울고 싶기까지 하다’, ‘옵테소프가 15 코페이카를 지불한다’, ‘곧 활기를 띄기 시작한다. 이제는 즐겁기까지 하다.’는 해설을 들었다. 약사의 아내를 선녀 같다고 표현하자 약사의 아내는 선녀 같은 몸짓을 했다. 덕분에 연극이 매우 즉흥적으로 느껴졌다.

 

옴니버스 중 가장 유쾌했던 건 두 번째 작품, ‘나의 아내들’이었다. 특히 라울의 네 번째 아내가 재미있었다. 애비를 잘못 만나 20만 루블에 팔려와 라울의 눈치만 보던 아내는 노래를 부를 때마다 생기가 있었다. 그 아내가 부른 노래는 ‘오페라의 유령’의 ‘the phantom of the opera’였다. 팬텀의 대사 ‘sing for me’가 ‘do not sing for me’, ‘날 위해 노래 하지마’가 되었다. 체홉의 연극에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넘버를 듣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체홉 같은 문장은 빠지지 않았다. 첫 번째 아내에 대한 묘사가 그렇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제 얼굴을 바라봤어요. 마치 제 이마에 악보가 쓰여 있고, 그 악보에 따라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처럼. 그녀는 제 얼굴을 보면서 말없이 감동하고 놀라워했어요. 가끔 제가 집을 비웠을 때 그녀의 눈을 시야를 상실한 것마냥 기능하지 못했어요.”

 

세 번째인 ‘아가피야’에도 부분부분 위트가 있었지만 앞 두 작품에 비해선 조용하고 무거웠다. 결혼한 몸이지만 사프카에 끌리는 아가피야. 선로에 있는 남편은 우편열차가 출발하고 나서 집에 오기 때문에 열차가 출발하기 전까지만 집에 가면 된다고 했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사프카를 두고 돌아가지 못했다. 자신의 더러워진 발을 닦아주고, 자신의 머리에 꽃을 꽂아주기만 한 무책임한 사프카에게 스스로를 묶었다. 다음 날 아침, 숲 속엔 아가피야를 찾는 목소리들이 들린다. 순간의 선택이 불러온 상황에 아가피야는 불안에 떨지만 사프카는 도와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이 지저분할 거라는 걸 미리 말했기 때문이다. 아가피야는 사프카의 미끼도 달려있지 않은 샤프카의 낚시대에 걸렸다. 스스로 물었기 때문에 사프카가 예뻐해주리라고 생각한 듯.

 

 

마지막은 제일 무거운 작품, ‘불행’이었다. 남편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소피아와 소피아에게 구애를 하는 일리인. 일리인은 자신의 마음은, 사랑은 천성이라고 했다. 싸울 수 없는 천성에 매번 옷깃을 잡혀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소피아를 놓지 못했다. 소피아는 자신을 사랑하는 일리인을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 했다. 조금은 모호하게, 불편한 주제는 어물쩍 넘어가기를 바랐다. 일리인과 그의 감정과 제대로 마주하지 못 했다. 그래서 뜬금없이 남편에게 떠나자고 했다. 

일리인도, 남편도 움직이지 않아서 소피아는 본심을 내뱉었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요."

 

 

여러 장르가 섞인 옴니버스라는 걸 알고 갔지만 그 폭이 생각보다 컸다.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면서 가볍게 보고 나올 걸 예상했는데 꽤 높았고 상당히 낮았다. 좋은 관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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