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 사람의 얼굴은 내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가득하지만 그의 마음에 가닿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믿는다. 무엇인가를 마주한 채 힘겹게 버티고 있는 그의 마음이 내게는 퍽 수월해 보이는 듯하지만 이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을 멈춘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도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상상의 불온함. 몇 사람의 불행과 죽음을 건너뛰어야 한 사람의 사랑을 긍정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가 너무 가까이 있는 날에는 세상의 모든 얼굴이 고루해 보이고, 너무 멀리 있는 날에는 내가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다.
그처럼 애정을 다시금 얻게 되자마자 내게는 그것이 짐스럽게 여겨지더란 말입니다. 화가 날 지경일 때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여자의 죽음이 이상적인 해결책일 거라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여자가 죽어 버리면 우리들 사이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확립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그 속박력이 없어질 테니까요.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죽음을 바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렇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지구 상의 인류를 모두 없앨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의 감정, 그리고 나의 인류애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 알베르 카뮈, <전락>, p.76
그러니 내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 어느 날부터 들리기 시작한 그의 목소리도 사랑에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심판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아는 이가 없다. 나의 죄는 분명히 아니다. 내게 이유조차 허락되지 않았을 리 없다. 스스로가 선택받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나의 지성은 내게 회개와 구원을 허용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한 대속인가? 어째서 내가 받는 고통만 이토록 불안하고 광대한가? 그것은 누구도 겪어보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겪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심판은 구원을 무실하게 한다.
나는 나의 구원을 포기한 채 그 사람을 생각한다. 사랑이 아닌 다른 형태로도 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구할 수 없다. (...) 어떤 틈과 같은 것. 꿈과 현실의 균열. 어긋나는 지점. 또는 미세하게 맞닿은 선.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 가능성으로 남아 인식 너머에 존재하는 사건.
- 최진영, <단 한 사람>, p.63
사랑과 사랑이 아닌 것 사이의 틈이 내가 서있을 곳이다. 그래야 나는 짐짓 심각하지 않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휩쓸려가는 순간조차 나의 갈 길을 아는 듯 자조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알지만 당신은 당신을 모른다는 확고함이 있어야 불안이 사라질 때까지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오만함을 눈치채고 실소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전락한다. 오만한 자만이 구원을 이행한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구원을 추동하되 그것이 나에게는 심판과 다르지 않다.
자기 수명을 잘라내어 사람을 살리는 것만 같았다. 미수는 한동안 잊고 살던 근본적인 질문에 빠져들었다. 왜 나인가. 그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간절하게 던지는 질문과도 같았다. 어째서 나인가. (...) 만약 내가 죽을 상황이라면 신은 나를 선택할까. 누군가에게 지시할까. 가서 나를 구하라고.
- 최진영, <단 한 사람>, p.85
여보세요, 어째서 그 사람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 아십니까? 지금 당신이 아마도 생각하고 계실 그 사람을 말이에요. (...) 진정한 이유는 그 자신이 자기가 완전히 무죄이고 결백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로부터 규탄받던 과오의 짐을 짊어지고 있진 않았지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는 다른 과오를 범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 자신이 그걸 몰랐을 리가 있겠습니까? 결국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 알베르 카뮈, <전락>, p.123
나는 '그 사람'의 사랑과 구원이 필요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가능성의 영역으로 남겨지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누군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으므로. 차라리 내가 그 사람을 구원해 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겠다. 다른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믿겠다. 그들이 믿는 것을 나는 믿지 않는다. 요컨대 내가 행하는 구원은 믿음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사랑이 남는다. 그들이 죽어가는 순간에 가장 많이 내뱉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라면, 그것이 나를 꿈꾸게 한다. 비로소 구원받지 못할 나를 사랑하게끔 한다. 나를 향한 심판이 그들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을 알고,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보다 그가 짊어지거나 남기고 간 죄를 사랑하는 일이 더 쉽다는 것을 알면 행복하게 죽을지도 모른다. 나의 무고를 변호하기보다 그의 죄를 사랑하는 것. 왜 그여야만 했는가. 어째서 나인가. 그가 나를 대신해 참회한다는 생각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참회를 원치 않는 죄성이 그 사람의 선택이었으므로 나는 나의 죄만을 희구한다.
좋은 소식을 기대합시다. 선택받은 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요, 부귀도 고통도 골고루 나누어지고, 당신은 오늘부터 나를 위해서 매일 밤 땅바닥에 눕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거문고를 울리게 되겠지요! 만약 하늘에서 수레가 내려와서 나를 실어 간다면, 혹은 갑자기 흰 눈에 불이 붙는다면, 당신은 깜짝 놀랄 겁니다. 그건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요? 나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나는 나가야겠습니다.
- 알베르 카뮈, <전락>, p.160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이것이 참회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는 불온함. 그 사람이 나에게 준 사랑으로 그 사람을 구하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 줄 사랑은 남아있지 않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구원을 받고 나면 그다음에 현전할 심판을 상상한다. 상상력의 과잉 혹은 결핍.
여보세요, 만약에 그 말을 곧이 듣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말 그대로 해야 할 테죠. 아이고 떨려. 물은 차갑거든요! 그렇지만 안심하십시다. 이제는 때가 늦었습니다. 영원히 때는 늦었어요. 다행한 일이지 뭡니까!
- 알베르 카뮈, <전락>, p. 162
잃어버렸다. 너의 어깨를 생머리를. 막차 시간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빗줄기는 그친 다음에도 빗줄기였고. 너는 이제 울지 못한다. 내게서 살지 않는다. 새벽녘 돌아왔을 때 빈방만 혼자서 울고 있었다. 온통 젖은 채 전부가 아닌 건 싫다고.
- 허연, <참회록> 부분
막차 시간은 이미 지난지 오래다. 오지 않을 그를 기다리는 일도 더는 남지 않았다. 나를 온통 젖게 만든 차가운 빗줄기만이 그친 다음에도 빗줄기로 남는다. 다행한 일이다. 그를 대신해 울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