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장의 말이 명언이 되고, 어떤 부모를 두느냐가 밈이 되고, 사람들은 꾸준한 노동의 결과물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점점 한 방을 노리고 있다. 우리 시대에 돈은 어떤 의미인가? 한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짓고, 앞으로의 삶을 선고하듯 보여주는 무거운 지표 아닌가? 우리 시대의 돈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 진로, 정치 등 삶의 총체적 영역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한 마디로 우린 ‘경제적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표상을 정말 잘 드러낸 소설이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이다. 책의 뒷면에 적힌 신형철 문학 평론가의 말처럼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만큼 시대상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읽으면서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을 명확하게 서술하기 때문이다.
[안녕이라 그랬어]는 7개의 단편 소설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이야기는 ‘경제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은 ‘좋은 이웃’이다. 소설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간단하게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좋은 이웃’은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는 부부가 이사를 고민하면서 시작된다. 아내는 방문 교사인데, 장애인 학생인 시우 가족이 좋은 곳으로 이사하는 것을 보며, 젊은 부부가 위층에 이사 와서 자신이 꿈꾸던 깔끔한 인테리어를 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박탈감을 느낀다. 부부는 대놓고 갈등을 겪진 않지만, 그들의 대화는 건조하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아내의 질문에 남편은 이 집을 계약하던 순간으로 돌아가 무리해서라도 집을 살 것이라고 한다. 아내는 유산한 아이를 구할 수 있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어쩐지 남편의 말이 더 진심같이 들린다.
소설 속 주인공 내면에 은밀히 자리 잡은 ‘구분’이 눈에 들어온다. 자신보다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장애인 시우의 가정을 보면서 주인공은 그들의 수업비를 인상하지 않는 ‘자비로운’ 결정을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것은 선한 일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마음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과 시우 사이를 ‘경제적인 시선’에서 구분 지었고, 그 구분 속에서 자신이 우위라고 생각했다. 마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처럼 주인공은 자신의 위치에서 도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상황이 시우와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차별과 차이점이 도덕이 되는 시대이다. 단편적으로 봤을 땐, 사람들은 공감되는 경험을 나누며 우리가 비슷하다는 것에 웃음 짓고 있는 것 같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지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차별화되는 스펙, 차별화되는 성적, 차별화되는 고고한 취미 등등. 어느새 공통점은 경시되고 더 나아가 치욕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누군가와 같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빠르게 그것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주인공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 주인공의 상황은 공통점을 넘어선다. 주인공 부부는 그 아파트를 떠나 이사를 해야 하지만 시우네는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젠 시우네가 차별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선에서 주인공의 박탈감이 이해된다. 자신의 차별성을 빼앗긴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가 이웃을 이런 시선으로 보았는가? 이웃과의 만남은 오로지 ‘대결’로만 가능하고, 서로의 공통점에 함께 박수치기보다 나의 차별성에 홀로 은밀히 미소 짓는다. 이 소설은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게 하며, 잊어버린 공동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순수하게 서로의 공통점을 찾는 데 열중했던 시간, 우리가 같다는 것을 두고 기뻐한 경험. 우리는 어떤 관계를 회복해야 할까?
‘좋은 이웃’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시우가 질문을 던지는 장면이다. 공동체, 이웃, 연대 등 핵심 단어를 가르치는 주인공에게 시우는 “선생님은 다 믿어요?” …“어떻게요?”라고 물어본다. 이에 대해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묻고 있다. 그런 가치들이 옳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다. 그 믿음을 계속 유지할 힘이 내 안에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근본 정서는 진행 중인 패배의 현장을 지켜보는 치욕이다. 302p.
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었고, 남과 자신을 구별 짓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에 더해, 그런 자신을 끊임없이 발견하지만 이미 자신을 놓쳐버린 듯한 감정을 느낀다. ‘좋은 이웃’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집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몰려온다. 외줄 타기를 하는 듯 최대한 정성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정서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떠밀려 공동체와 연대, 공통점, 안부의 개념을 희미하게 지우고, 그것을 다시 그릴 ‘나’마저 놓쳐버린다.
사실 시우의 질문은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기도 하다. 평범한(이젠 평범함의 기준도 잘 모르겠지만) 대학교 3학년이 하는 생각은 정말 뻔하다. 전국의 모든 대학교 3학년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다행인 건가. 요즘엔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예전엔 공연을 좋아하고, 연극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렵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그렇게 망설여질 수가 없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느껴서 그러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멋지게 이뤄야 할 것 같고, 실제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현실적’이라는 말이 나에게 너무 명확하게 다가와서 이전에 꾸었던 꿈들은 모두 철없는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난 이야기의 힘을 믿고 하나의 이야기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믿는다. 그래서 난 세상에 필요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도 시우처럼 이야기의 중요성과 그 힘을 믿지만, 그 믿음을 지속할 힘이 없다. 친구들은 계속 어느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만 같은데, 그 속에서 난 멋있게 다른 길을 선택하지도, 친구들을 따라가지도 못한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 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다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무엇일까 반문합니다. … 그런데 여보, 우리가 잘살게 되면 우리가 ‘더’ 잘 살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때도 이웃이 생각날까? 그저 약간의 선의와 교양으로 가끔 어딘가 기부하고, 진보 성향의 잡지를 구독하는 정도로 우리가 좋은 이웃이라 착각하며 살게 되지는 않을까? 141p.
나도 결국 이렇게 살게 될까? 멋진 어른을 꿈꿨던 시간들은 전부 꿈이었을까? 독서 모임에서 우리는 우리가 꿈꾸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정한 사람, 솔직한 사람, 계속 좋은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 세상에 발을 맞추면서 자신의 심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 본인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하는 사람. 이런 우리에게 소설 속 문장이 아프게 다가온다.
자기야. 근데 나이드니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얇아져서 쉽게 찢어지더라. 163p.
돈이라는 건 참 무섭다. 소설 내내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 삶에 스며들어와 타인을 구분 짓게 하고,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며 이전의 가치들을 희미하게 한다. 돈을 악마화하는 것은 아니다. 돈에는 특정한 선악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중요한 건 그것을 생활화하는 경제적 삶의 모습이다. 돈과 인격을 분리하는 시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에서 이야기하듯 “많은 이들이 다 같이 추워지기로 결심한 어떤 시절 혹은 시대”에서 우리는 돈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입김을 불어 넣어야 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 순수한 궁금증에서 왔던 안부. ‘빗방울처럼’이라는 소설 속 도배를 하던 외국인 노동자 여성은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런 것들이 세상의 온도는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온도를 조금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구석에 버려둔 믿음을 다시 꺼내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