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늘 채우는 것에 집중했지만,
비웠을 때 비로소 진정한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피아니스트 신아람의 ‘비움프로젝트’ 그 두 번째 여정, 『After Bium』 음반 발매 기념 연주회가 JCC 아트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공연에는 ‘비움’에 대한 신아람의 음악적 사유가 담긴 앨범 『After Bium』의 전곡이 소개된다. 채우기에 익숙한 오늘날에 ‘비움’은 낯설고 때론 두렵다. 바쁘다 바쁜 현대사회에서 뒤처질까, 소외될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통과한 신아람은 음악을 통해 비움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비로소 비움이 실현된 공연으로 새로운 울림을 선사한다.
‘신아람 After Bium - 비움프로젝트 II’는 덜어냄이 ‘선명함’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다. 그것은 단지 정량적인 감소가 아니라, 상징적인 여백에 가깝다. 이번 공연은 피아노, 색소폰, 드럼이라는 비정형적인 트리오로 편성됐다. 일반적인 재즈 트리오에 필수적인 콘트라베이스가 빠진 구성은 의도된 실험이자 질문이다.
결과적으로 결핍은 새로운 리듬을 창조하고, 청자는 해석의 여지를 부여받는다. 연주자들—피아노의 신아람, 색소폰의 김기범, 드럼의 김선빈—은 악기를 ‘말(Words)’처럼 다루며, 차분하게 그것을 증명했다. 비움이 만들어낸 여유가 더 자유로운 선택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관객과의 소통도 놓치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비움’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연주자와 관객의 협연이다.
『The Farewell』 & 『Hometown Reverie』
작별, 헤어짐.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끝’이다. 그러나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다. 신아람의 ‘비움프로젝트’는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비울 때 어떤 일이 생길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지나치게 꽉 붙들고 있지만 생각해 보지 못했던 소중함을 결국 그것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역설을 음악으로 풀어낸다.
『Hometown Reverie』도 이러한 맥락에서 탄생했다. 신아람이 오랫동안 살았던 동네의 ‘재건축 소식’을 접하며 작곡한 곡이다. 익숙했던 곳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아쉬움 속에서 새로운 곡이 탄생하는 그 경계를 주목할 때, 비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각자의 속도로 함께 걷는 : 『자유로운 보폭(Free Strides)』
『자유로운 보폭(Free Strides)』은 공연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곡이다. 현장에 있던 관객들도 박수 세례를 아끼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각자의 보폭(리듬)이 돋보이는 곡이지만, 완벽히 조화를 이룬다.
세 연주자의 호흡은 각기 다르면서도 어긋나지 않았다. 드럼은 리듬의 뼈대를 흔들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피아노는 그 흐름을 유연하게 타는 듯했다. 색소폰은 그사이를 유영하며 둘 사이를 연결했다.

특히 숨이 멎을 듯한 속주의 구간에서는 그들의 집중력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마치 무대 위의 즉흥극처럼, 음악은 예측을 배반했고 관객은 완전히 몰입했다. 다만, 자유로운 보폭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귀는 서로를 향했다. 자유롭지만 조화로운 연주가 가능했던 이유다.
신아람은 연주가 시작하기 전, 『자유로운 보폭(Free Strides)』을 통해 연주자들의 성향을 알 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그의 예견은 적중했다. 곡은 작곡가의 글이고, 연주는 연주자의 말이기 때문일까. 음악의 조예가 있거나 악기를 연주한 경험이 있기에 느껴지는 감상은 아니었다. 수많은 장르 중에서도 음악을 업으로 삼아 자기를 표현해 왔던 이들이 발산하는 에너지는 곧 그들 자체였다.
새로운 여정을 위한 가벼운 걸음 : 『Journey Unbound』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Journey Unbound』는 말 그대로 비움의 끝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여정이다. 거창한 선언도, 숭고한 의지도 없었다. 다만 비워낸 자의 가벼운 발걸음을 연상케 했다.

신아람은 작곡과 연주, 공연 기획까지 전 과정을 책임졌다. 그 진심은 곡에 스며들었고, 무대에서 살아났다. 자작곡이 특별한 이유는, 곡을 쓴 이가 그것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퍼포머와 프로듀서는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작곡과 연주 혹은 공연은 긴밀히 연결된 듯 분리되어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자작곡, 싱어송라이터에게 열광하는 것은 곡을 쓴 사람이 그 곡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무대는 그 믿음을 증명하기 충분했다.
비움프로젝트는 음악만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초심자에게도 부담 없이 다가올 수 있도록 설명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음악적 요소를 비워낸 여유로운 울림 안에서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머물 수 있다. 덕분에 재즈나 연주회에 익숙하지 않은 누구라도 부담 없이 이 무대를 즐겼으리라 생각한다.
2년 가까이 비움의 여정을 실천해 온 관객으로서, 이번 무대는 더없이 반가웠다. 각기 다른 분야에서 일하지만, 신아람의 음악에 공감한 누구라도 이 프로젝트에 동참할 것이다. 공연은 일찍이 끝났지만, 여운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비움의 끝에서 만난 새로움은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하는 힘이 되었다. 두렵고 막막했던 비움을 용서하고, 내딛는 한 발이 무척 가볍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