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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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에게 이야기꾼은 꽤 친숙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존재의 영향력이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볼 수는 없다. 무언가를 제대로 이야기 들려줄 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서 경험을 나눌 줄 아는 능력이 박탈되는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경험의 가치가 하락함에 따라 나타났다.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다. 모든 이야기꾼이 풀어내는 이야기의 원천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이다. 타고난 이야기꾼들은 실제적 관심을 지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진정한 이야기가 어떤 사정에 있는지를 시사해준다. 진정한 이야기란 드러내거나 숨긴 채로 유용한 무엇인가를 지닌다. 이는 도덕이기도 하고, 실제적 지침이기도 하며, 속담이나 삶의 격률이기도 하다.


또한, 이야기꾼은 듣는 이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나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줄 줄 모르게 되었다. 조언이란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것과 관련된 일종의 제안이다. 조언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그런 이야기를 펼쳐 풀어놓을 줄 알아야 한다. 삶의 직물 속에서 짜여 질 때 조언은 지혜가 된다. 이야기하는 기술이 종언을 고함은 지혜가 사멸하고 있음이며, 오래전부터 진행 되어온 과정이다.

 

 

 

2.


 

이야기의 몰락이 일어나게 된 과정은 근세 초기에 소설의 세력이 왕성해진 까닭이다. 소설을 이야기와 구별시키는 것은 소설이 책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시작한다. 소설은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확산되었고 이는 동화나 전설과 같은 구전의 전통과 관련이 없이 구별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소설과 이야기는 구별된다. 이야기꾼은 자신이 이야기하는 것을 어찌되었든 이야기에서 취하며 다시금 사람들의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하지만 소설은 자신을 고립시킨다. 고독한 개인이 된다. 이 개인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모범적인 예시로서 표현할 수도 없고, 조언을 받지 않으며 해줄 수도 없다.


그렇기에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서술할 때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을 극단으로 끌고 감을 말한다.


그러나 21세기에 와선 새로운 형식이 서사 형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소설과 이야기 모두를 위기로 몰고 있는 새로운 소통의 형식은 바로 정보이다. 정보는 즉시 검증될 수 있다는 요구를 내세운다. 그러나 이야기가 정보와 다른 점은 설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는 서술된 이야기를 자기가 이해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이로써 이야기는 정보가 얻지 못하는 새로운 진폭을 얻게 된다. 결국 진정한 이야기란 한순간에 가치가 사라지는 정보와 다르게 소진되지 않으며 그렇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가치를 빛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이야기조차 줄여나가고 있다. 이젠 단편소설이 생겨나는 과정 속에서 구전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인간은 수많은 시간 동안 죽음에 대해 생각해 왔다. 죽음이란 인간의 삶이 마감되는 순간 일련의 이미지들이 떠오르듯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이러한 권위를 갖는다. 이야기의 기원에는 이러한 권위가 있다. 그렇기에 죽음은 이야기꾼이 보고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인정이다.

 

 

 

3.


 

어떤 서사 형식이든 그것을 연구하는 작업에는 서사 형식과 역사 기술 사이의 어떤 관계가 있는지 탐구해야 한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듣는 자에게 주도성을 가지게 만드는 과정은 이야기를 재현할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기억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서사적 흐름이다. 방대한 기억으로 인해서 인간은 사물들의 흐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그 사이의 사라짐이나 죽음과 만날 수 있다.


결국 기억은 사건을 세대 간에 전달하게 만드는 연쇄 작용으로 마치 그물망과 같다. 이는 이야기꾼들이 보여준 한 이야기와 연결된 다른 이야기의 구조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이 서사적 기억이다.


이야기꾼과 소설가의 가장 큰 구분점은 함께 있는 존재의 유무이다. 이야기꾼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과 함께 있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혼자다. 이러한 고독 속에서 독자는 소설의 소재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시키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위대한 이야기꾼에겐 공통된 특징이 있다. 자신의 경험을 마치 사다리처럼 사용하여 자유롭게 올라가고 내려간다는 점이다. 이로써 아래로 내려갈 때 지구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위로 올라갈 때는 구름에 닿는 것처럼 집단적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때 집단적 경험에서는 개인적 경험의 가장 큰 충격인 죽음조차도 충격의 범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발레리는 예술에서 영혼과 눈과 손 사이에서 특정한 화음을 만들어내고 그때 얻을 수 있는 물음이 신비적인 깊이를 만든다고 말했다. 이로써 영혼, 눈, 손은 상호 영향을 미치는 실천적인 협동 작업이다.


결국 이야기꾼이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그 경험의 원료를 탄탄하게 가꾸면서 유용한 동시에 일회적인 방식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이야기꾼은 자기 삶의 심지를 조용히 타오르는 이야기의 불꽃으로 완전히 태울 수 있는 사람이다.

 

 

 

4. 오늘날 이야기와 소설의 자리


 

이야기꾼은 이야기가 발생하는 현장에서 화자, 청자, 이야기 등으로 구성될 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과거 이야기꾼은 이야기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 없이 -소설과 다른 지점-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존재하는 청중의 의식하며 이야기했다. 그렇기에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었고 모두가 이야기꾼이 될 수 있었다. 함께함의 순간에 이야기는 추가와 생략이 동시에 진행되며 이어져 올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이야기를 듣는 역할의 청중조차도 화자로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마치 청중 없는 이야기판이나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청중을 의식하지 않는 이야기판과 같다. 앞서서 자신의 이야기만을 보여주려고 하다 보니 들을 수 있는 순간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의 자리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화자는 기억의 그물망을 헤집어 놓는다. 그러면서 인터넷과 현실에서는 ‘꼰대’라는 용어가 사용되며 청중의 무관심을 만들게 된 것이다.


발화하는 화자만 있는 곳에선 이야기가 발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자리엔 화자와 청자 모두가 있어야 한다. 앞서 발터 벤야민이 이야기꾼은 듣는 이에게 조언을 해줄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음을 통해 오늘날 이야기의 자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야기의 자리에서 화자의 자리가 흔들렸다면, 청중의 자리 역시 불안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2023년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다. 이때 한 시청자가 잔소리는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쁘지만, 조언은 더 기분이 나쁘다고 답했다. 이러한 답이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게 된 이유는 지금의 시대가 도덕이자 실제적인 지침이 되기도 하는 ‘진정한 이야기’의 이야기판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발화되는 이야기는 화자마다 나름의 살을 붙이고 덜어내면서 구체화 된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적으로 진행되면, 그 결과 조언이라는 일종의 제안이 탄생한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정보화 시대에서 삶의 지혜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색만 한다면 수많은 정보가 쏟아진다. 물론 정보가 가진 장점도 있지만, 이야기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진정한 이야기란 시대가 변하고 이야기꾼이 달라져도 가치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야기는 화자의 개인적인 해석이 붙어 풍부해진다. 그렇기에 정보와 비교하였을 때 우리가 찾아가야 할 올바른 소통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이야기의 자리가 제대로 된 이야기판으로 펼쳐지기 위해서는 화자(이야기꾼)와 청중 모두가 자신의 역할에 집중하며 협동해야 한다. 발레리는 자신이 관찰한 한 예술가를 통해서 영혼과 눈, 손의 협동 작업을 발견했다. 이야기 역시 영혼, 눈, 손의 협동처럼 화자와 청자가 서로 마주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이야기가 가야 하는 다음 자리를 생각해 본다면, ‘텍스트힙’과 같은 유행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본다. 현재 소설의 자리는 새로운 유행의 시작점으로 변화했다. 고독한 소설의 자리가 타인과 함께 텍스트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신문을 읽는데, 그것도 인터넷 기사가 아닌 종이 신문을 읽고 있다. 내가 읽는 책이나 신문을 청중에게 드러낸다. 이러한 시대에서 이야기의 자리 역시 이야기함이 우리에게 재미와 지식을 주는 소통 과정이 된다는 점을 다시금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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