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A One And A Two
Yi Yi (하나, 하나)
우리는 스스로의 앞면만 볼 수 있다. 내 뒷모습을 확인하려면 타인의 눈이나 카메라의 렌즈를 빌려야 한다. 〈하나 그리고 둘〉은 이 단순한 시각적 한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영화의 제목이 말하듯, 이 이야기는 ‘둘이 되어 하나가 되는’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원제 Yi Yi: 하나, 그리고 또 하나. 각자는 끝내 개별적인 하나로 남는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서로의 전부를 소유하지는 못한 채로 살아간다. 카메라가 대상을 붙잡아두는 방식과 달리, 인간의 시선은 언제나 해석을 섞는다. 우리는 시선에 맺힌 상을 카메라 렌즈와 다르게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고 싶은 의미를 덧입힌다. 그 과정에서 상대는 ‘진짜 모습’이라기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다듬어진다. 나는 그 가공된 초상을 상대의 실체라고 착각하고, 그 착각에 신뢰라는 이름을 붙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믿음’은 어쩌면 그런 종류의 편집이다.
믿음은 불확실한 타인을 예측 가능한 틀 안에 잠시 세워두려는 시도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상대라는 대지에 기대를 심고 “이만큼은 변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겹쳐 올리는 일과 닮았다. “그때 꼭 만나자”는 허술한 약속조차, 내 안의 호감과 애정이라는 안료가 닿는 순간 미래처럼 굳어 보인다. 어긋남은 대개 여기서 시작된다. 기대가 먼저 자라고, 그 기대가 만든 빈칸을 견디지 못해 나는 스스로 밑그림을 그려버린다. 상대는 그 위에 색을 얹기만 하면 된다고 상대방에게 기대를 건네 보인다. 내 기대의 윤곽에 맞는 미세한 반응 하나만 있어도, 이 믿음을 향한 시도들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도 그 시간동안 다른 기대를 쌓아 올렸을 것이다. 또는, 색을 올리지 않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이어 그리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영화가 집요하게 보여주는 건 타인의 의도를 ‘아는 일’이 아니라 보이는 앞모습뿐이라는 사실이다. 직접 본 장면은 힘이 세다. 불투명한 관계 속에서 드물게 선명한 증거가 나타나면, 그 증거는 내 머릿속 상상과 불안을 ‘사실’처럼 단단하게 만든다. 그렇게 찾아온 기대의 실패는 곧바로 ‘실망’이라는 색으로 관계를 물들인다.
“내가 밑그림까지 다 그려줬는데, 왜 이것마저 못 해줘?”라는 원망은 사실 상대를 향한다기보다, 내가 세워둔 믿음의 구조를 유지하려던 통제가 무너졌다는 감각에서 자주 태어난다. 우리는 눈으로만 세계를 확인할 수 있지만, 해석은 훨씬 복잡한 경로를 거친다. 보이는 것은 그 과정에 제출되는 하나의 자료일 뿐인데, 나는 때로 그 자료를 결론처럼 받아들인다.
우리에게 주어진 ‘마음’이라는 색연필의 길이는 유한하다. 타인은 내 색연필이 닳아 없어지는 속도에 대체로 무심하다. 어떤 관계는 몇 번의 선으로 끝나지만, 어떤 관계는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혼자 그리고 칠하며 소진된다. 우리는 내가 그려둔 스케치 위에 상대가 아름다운 색을 입혀주길 꿈꾼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건 그 꿈이 자주 어긋난다는 사실을 배우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은 완성된 그림을 내게 억지로 쥐여 주고, 어떤 사람은 내 스케치 위에 원치 않는 색을 덮어버린다. 관계는 가끔 그 정도로 일방적이고,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깨진 믿음을 복원하는 일은 의외로 간단해 보인다.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없었어.” 그 얇은 한 문장만으로도 우리는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빠진다. 하지만 다시 붙은 믿음 위에는 금이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파편을 주워 드는 이유는 상대를 온전히 신뢰해서라기보다, 나의 기다림과 헌신이 전부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내 감각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만 기다렸던 건 아니었어”라는 확인은, 낡아가는 관계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명분이 된다.
결국 믿음은 상대에게 부여하는 숭고한 가치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변화에 맞서기 위해 급히 만든 안심의 틀에 가깝다. 그 틀이 무너질 때,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말한다. “네가 믿게 했잖아.” 혹은 “네가 멋대로 믿은 거잖아.” 믿게 한 사람과 믿을 수밖에 없던 사람. 이 말다툼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설계도와 서로 다른 재질로 지어진 믿음이 맞닿는 순간, 무엇이 오래 버틸지는 애초에 알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종종 기도한다.
상대의 믿음이 내 것보다 조금 더 견고하기를.
나의 스케치와 당신의 색채가 기적처럼 들어맞기를. 영화 속 어린 양양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어 건네려 했던 마음도, 어쩌면 그 기도와 닮아 있다. 서로는 서로의 뒷면을 볼 수 없고, 그 결핍을 메우는 방식은 대개 서툴다. 그럼에도 하나와 하나는 완전히 합쳐지지 못한 채로, 각자의 불완전함을 들고 다시 살아간다.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을 끝내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그 닿지 않음을 인정한 뒤에도 다시 믿어보는 일뿐이기에.
"사람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걸 알려주고, 그들이 볼 수 없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하나 그리고 둘>에서 양양이 건네는 말은 한계를 인정하는 방식에 가깝다.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당신이 알려주고, 당신이 볼 수 없는 것을 내가 알려주며 서로의 사각을 조심스럽게 교환하는 것.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그래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려고 애쓰는 것. 우리가 끝내 닿지 못하는 뒷면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맹목적인 완성이 아니라, 서로에게 ‘보여 줄 기회’를 건네는 삶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