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시인 조에 부스케는 그의 저서 <달몰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들은 말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 같다. 혹은 나 스스로 입 다물기 원했는지도. (...) 인간의 사고는 단어들과 맞바꿔지면서 흔해빠진 초상화가 된다." 언어가 사고를 짓누르고 사고가 언어를 추동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 경계가 모호하다. 나라는 사람의 안과 겉을 그것들과 동등한 층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어떤 날에는 조금 더 멀찍이 서서, 또 어떤 날에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 언어와 사고의 경계의 실상은 내 마음의 안과 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느끼는 순간이 마음에 어떠한 병이 들었다는 징후로 해석된다. 말이 많은 사람은 얼마나 세상에 무관심한 것일까. 마음이 자유로워질수록 생각은 말이 되기를 거부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집에 한해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들춰보면 항상 이문재 시인의 <마음의 오지>가 자리하고 있다. 처음 읽어본 시집도 아니고 처음 구매한 시집도 아니었지만 내 기억 속의 가장 오래된 시집이다. 마음에도 안과 겉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일은 드물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표리부동과는 다른 것이다. 마음 안의 마음과 마음 밖의 마음이 불화할 때 오히려 일종의 평형과 긴장이 함께 찾아온다. 내 마음 안의 사고를 언어의 모습으로 마음 겉에 꺼내놓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박하고 있던 마음을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언제부터 내 것이 아닌 마음을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그러한 연유로 마음은 유배된다.
여름날은 혁혁하였다
오래 된 마음 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 <수국> 전문
마음 속의 마음들, 마음들 속의 마음이 피어나자 비로소 마음이 떠난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내게서 떠난 마음은 언젠가 다시 내게로 돌아올 때까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오지에 머문다. 너무 바빠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이 오지에 머무는 시간조차 길게만 보인다. 뿌리들이 정돈할 시간을 줄 여유가 없다. 마음 하나가 떠날 때마다 얼마나 오랜 시간 침묵해야 하는지 나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안과 겉>의 서문에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심지어 그 훗날, 중병에 걸려서 잠시 동안 생명력을 잃고, 그로 인하여 내 속의 모든 것이 온통 모습을 바꾸어버렸을 때에도, 보이지 않는 폐질과 그로 인하여 전에 없이 느끼게 된 허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포감과 낙담은 경험했지만 원망이란 것은 끝내 모르고 지냈다. 그 병은 필경 내가 이미 받고 있던 구속에다가 또 다른 구속을, 그것도 가장 가혹한 구속을 덧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병은 결국 저 마음의 자유를, 세속적인 이해관계에 대하여 얼마만큼 거리를 둘 수 있는 심리 상태를 돕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항상 내가 원한의 마음을 품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마음이 잘 맞는 사람에게 일순간 원망을 가지게 되는 병을 얻게 되느니 차라리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마음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때 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 얼마나 거리를 둘 것이냐 하는 문제일 테고, 나는 그것에 기인한 고뇌의 끝에서 이따금 마음의 오지를 훔쳐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내 마음 속의 마음들 사이가 이토록 멀다. 나와 당신 사이의 거리를 헤아리는 일은 몇 번을 거듭해도 부족하기만 하다. 당신은 마음이 멀어지고 나서가 아니라 마음이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순간에 거리를 헤아려야 한다.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 <노독> 부분
끝나지 않은 길을 끝났다고 생각하는 일만큼 아쉬운 것은 없다. 내가 구태여 이 길을 끊지 않더라도 길이 나에게 내려서라 하는 순간이 온다. 그때 멈칫거리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면 된다. 그런 마음도 오래된 기억의 생생함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이란 더는 당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길이 내게로 뻗기 시작한다. 오지에 있던 마음들이 하나둘 내게로 돌아오듯이. 나는 당신을 떠나보내고 마음들을 되찾는다. 당신과 함께 있던 날에 내가 멋모르고 버렸던 마음들이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마음의 오지> 부분
언어를 내뱉는 일보다 사고를 감추는 일에 부주의할 때 마음은 돌아올 기미가 없고 아침은 멀기만 하다. 당신이 그동안 그리워했던 것은 당신이 아닐지 모른다. 나와 당신의 거리가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당신과 조금씩 멀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내게는 슬프지 않다. 당신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내 마음들이 내게 슬픔을 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뿐 아니라 그 누구도 내게 슬픔을 줄 수 없음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나는 또 한 번 당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주고받은 마음만 기억하지 말자. 오지에 버려져 우리에게 돌아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마음 역시 훗날 우리를 대신할 길이다. 길을 걷다가 문득 당신과 걸었던 길이 떠오르면 그때 그 마음이 과거에서 여전히 지금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잠겨 웃음이 나올 것도 같다. 그리움조차 함부로 나의 몫이 되어주지 않는다.
몸에서 나간 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언제 나갔는데 벌써 내 주소 잊었는가 잃었는가
그 길 따라 함께 떠난 더운 사랑들
그러니까 내 몸은 그대 안에 들지 못했더랬구나
내 마음 그러니까 그대 몸 껴안지 못했더랬었구나
그대에게 가는 길에 철철 석유 뿌려놓고
내가 붙여댔던 불길들 그 불의 길들
그러니까 다 다른 곳으로 달려갔더랬구나
연기만 그러니까 매캐했던 것이구나
- <마음의 지도> 전문
우리에게는 아직 걸어가야 할 길이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