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섬에서 발견한 언어

글 입력 2024.02.0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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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글을 쓰고 또 쉽게 글을 버리듯이, 가없는 저마다의 언어들 속에서 우리는 빠르게 길을 찾거나 혹은 방황한다. 길을 찾은 사람들은 정답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행동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고개를 떨군 채 좀처럼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역전된다. 방황은 길이 되고, 길은 가볍게 흘려보낸 사유의 시간들을 대신하여 자리한 하나의 섬이 된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그러한 섬의 존재를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섬이 우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오늘 아니면 내일 길을 잃고 방황할 사람들이기에 이와 같은 자각은 필연적이다. 섬에 도착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들은 예외없이 미아가 된다. 길을 잃은 아이가 간절하게 요구하는 것은 오직 부모에게로 가는 길 하나뿐이겠으나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할 장소조차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섬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도일까?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답을 얻는 사람들은 적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사실 정답이 아닌 아름다움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바래왔던 것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왔던 언어의 호흡은 아름다움에 대해 길게 읊조리기에 충분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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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장 그르니에의 문장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언어를 암시한다. 비밀은 곧 침묵이다. 침묵은 아름다움에 다가가는 언어다. 특정한 목적지를 설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걷고 싶은 사람에게 이정표를 확인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공연을 감상한 이후 며칠이 지나도 잔존해있는 여운에 흠뻑 얼굴을 적시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 자체를 즐기는 사람에게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이냐며 질책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사회에 만연해있는 부조리와 차별을 참지 못해 (본인들이 만들어낸 부조리와 차별일 수도 있다.)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분개하는 자신들에게 왜 동조해주지 않느냐며 힐난하는 것은 침묵이 아니다. 

 

너무도 쉽게 접한 문장들과 어디서 온 것인지 분명치 않은 사유들, 짐짓 무겁고 진중하게 외치는 분노와 책망의 고함과 의미가 분명히 정의되지 않은 채 남발되는 언어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쩌면 저마다의 목소리들이 너무나 높아져버린 탓에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을 침묵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참담한 현장일지 모른다. 

 

앞서 기술했듯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답만이 아니다. 오히려 깊은 사유가 결여된 정답은 또 다른 방황을 낳을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침묵이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이 세상에는 혹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에게는 정답이 아니기에 그저 불만족스럽고 비참할 뿐인 그 무엇으로 치부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길이다. 아름다움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라 나에게로 들어가는 길이다. 정답과는 무관하다고 해도 단지 어디로든 길을 걷고 싶은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 아무런 말도 요구되지 않기에 침묵이라는 언어로 나 자신과 대화하며 걸어가는 것.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목소리들로부터 달려 나와 문득 도착한 폐쇠적인 섬에서 발견한 언어는 침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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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감정치고 깊이 감춰진 감정이 아닌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사람의 가장 깊은 감정은 침묵 속에 있다는 토마스 모어의 격언과 궤를 같이 하는 문장이라고 생각된다.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들과 오직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이제 각자의 섬에서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도처에 가득한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정답만을 갈구하는 사람은 끝내 그 자신의 가장 내밀한 문제는 미결로 남겨두게 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문제의 실마리는 침묵 속에서, 온몸으로 가장 강렬한 감정에게 부딪히면서, 묵묵히 아름다움을 향해 걸어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에 은은하게 비춰진다. 언젠가 주변의 무거운 목소리들이 나를 짓누르고 모두가 나에게 정답을 찾아내라며 압박할 때, 그때 나는 다시금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책을 펼칠 것이다. 그리고 그날 나와 다른 세상에서 치열하게 살아왔던 누군가 역시 섬으로 홀연히 떠날 것을 예감한다. 그 사람의 가방 한 켠에 이 책을 넣어두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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