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간 여행자가 될 수 없다면 [도서/문학]

'시간여행자의 아내'를 읽고
글 입력 2024.01.13 09:5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pocket-watch-1637396_1280.jpg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일단 집을 살 것이다. 어디에 어떤 집을 살진 사실 잘 모르겠지만, 해당 가정을 하는 사람들 십중팔구가 집을 산다고 답하는 만큼 최우선 목표로 삼아도 손해 볼 건 없겠지.

       

‘만약 내가 8개 국어를 원어민처럼 구사할 수 있게 된다면’.


우선 가장 배우고 싶었던 일본어를 선택하고, 미국에서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쓴다는 언어인 스페인어도 고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구수가 많은 중국어나, 오랫동안 놓았던 프랑스어도 다시 익히고픈 욕심이 있다. 그러고도 네 개나 더 고를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정말 즐거운 고민이다.


그런가 하면, ‘만약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과거의 나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다면’ 같은 가정은 좀 더 간절한 마음으로 접근하게 된다. 로또 당첨은 번개 몇 번 맞을 확률만큼이나마 존재하고, 언어야 공부하면 된다지만 시간 여행만큼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책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주인공 헨리는 무려 시간 여행자다. 시간 여행이라 하면 요즘 웹소설을 중심으로 여러 매체에서 유행 중인 키워드, ‘회귀’를 떠올릴 수 있다. 우연한 계기로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이, 그간의 지식을 이용해 입맛대로의 미래를 살아간다는 내용의 장르다.


자연히 우리는 헨리에게도 같은 것을 기대하게 된다. 이 헨리라는 인물도, 분명 인생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그러나 헨리는 시간 ‘여행자’지, ‘관조자’가 아니다. 사실 헨리의 시간 여행은 새롭고 설레는 여행이 아닌 고독한 방랑에 더 가깝다.


일단, 헨리는 시도 때도 없이 시간을 넘나든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여행할 수도, 원하는 때와 장소에 떨어질 수도 없다. 심지어 그에게는 시간 여행을 할 때마다 알몸이 된다는 우습고 안쓰러운 페널티까지 있다. 기대와는 좀 다르지만, 그야말로 시간 여행 능력 따위 없는 평범한 우리들을 위한 주인공이다.


헨리는 무엇 하나 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달갑지 않은 미래가 다가옴을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없는 슬픈 운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그에게도 안식처는 있다. 달이 지구 주위를 떠돌지만 절대 멀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방랑자인 헨리에게도 발 디딜 지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아내 클레어다.


클레어는 시간 여행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고 성인이 되어 헨리의 연인이 될 때까지 여러 시간대의 헨리와 만나며 시간의 농간에 휩쓸린다. 보이지 않는 미래 때문에 애를 태우고, 하염없이 헨리를 기다리면서. 마침내 부부가 된 후에도, 헨리의 불안정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몸 안에서 오래 살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유산의 슬픔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을 거친 모든 슬픔은, 이를 상쇄하는 선명한 행복으로 돌아온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헨리가 클레어에게 남긴 편지 중 등장한 글귀, ‘사랑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다. 이 말대로 헨리는 언제나 클레어에게 돌아오고, 클레어는 그녀의 기다림을 보상받는다.


헨리가 인생의 고난을 의인화한 듯한 인물이라면, 클레어는 그런 고난을 받아들이고 끝내 회복하는 인물로 느껴졌다. 이쯤에서 클레어의 자리에 우리들의 모습을 대입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과거의 나와 화해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내가 나아졌다면, 그것도 일종의 '시간 여행'이 아닐지.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과거의 나에게 박했다. 과외에 성실하게 참여하지 않아서 마이너스 1점. 등교 전날인데도 스마트폰을 만지며 밤을 새우느라 마이너스 2점. 폴더에 준비해 온 파일만 옮기면 되는 그 간단한 일을 못 해서, 고맙다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아서, 어려워하는 과목을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해서...


사실 이것마저도 일종의 변명이었다. ‘쟤는 이상하고, 나는 정상이고’ 하면서 선을 긋고 싶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임을 안다. 과거의 나를 없던 일로 하면, 그때 느꼈던 결핍을 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타박 대신 긍정적인 스포일러를 보내고 싶다. 하고 싶었던 취미에도 도전하고, 너를 이해하는 사람과 만나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분명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를 위한 멋진 스포일러를 준비해 두고 있다고, 오늘도 그렇게 믿으며 살아간다.

 

 

 

안세림.jpg

 

 

[안세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6.24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