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에 임박하는 경험 ② [도서/문학]

성동혁의 『6』과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속 시세계
글 입력 2023.12.0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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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연재물은 성동혁의 『6』과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사이 상호텍스트적 분석을 진행한다. 죽음에 임박하는 경험이 각 시인의 시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비평하고, 두 시집이 전달하는 죽음에 대한 교훈을 찾고자 한다.

 

 

그림33.png

왼편부터 차례대로 성동혁의 『6』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Ⅱ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직면 · 극복하는가


 

위에서 나타난 두 시인의 인식 차이는 이들이 죽음의 상황을 어떻게 직면하며 극복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삶과 죽음을 분리된 실체로 이해하고 죽음에 강한 거부감을 표현하는 성동혁 시인은, 불평등한 삶의 영역에도 속하지 않고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의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 세계를 추구한다.

 

 

발이 닿는 곳마다 붉게 오염되던 당신의 군락이 그립다 나의 군락에선 나의 발자국을 볼 수 없어요 붉고 붉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붉은 투명 인간 그대여 당신의 흰색은 더욱 아름다워요 망명도 안 되는 나의 붉은 군락에서 나 좀 없애 줘요

 

- 성동혁, 「흰 버티컬을 올리면 하얀」 (부분 인용)

 

 

위의 인용에서 나온 것처럼 성동혁 시인은 이상 세계를 흰색으로 표현하고 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을 붉은 색으로 표현해 자신의 시세계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며 신이 자주 등장한다. 성동혁 시인은 신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출하여 생존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명한다. 반면 김혜순 시인은 환상적 존재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이는 아래의 인용에 나타난다.

 

 

어디로 가니?

이 냄새나는 천사야

날개 빼앗긴 환영아

네 손가락에서 나는 더러운 냄새

(중략)

빛으로 칠해놓은 세상을

네가 다시 검게 칠하느라 다 지나갔다!

 

- 김혜순, 「나날」 (부분 인용)

 

 

김혜순 시인에게 절대자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두어가는 존재로, 사회가 생명력의 빛을 잃게 만드는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김혜순 시인이 절대자가 지니는 모순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성동혁 시인의 경우 절대자의 한계를 인식하는 과정이 시집 전반에 걸쳐 점층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口」에서 ‘창세기를 여러 번 읽어도 나는 가위에 눌렸다’라고 서술해 종교에 의존하는 것만으로는 불안을 해소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6」에서 ‘당신의 본명은 성경이었는데 이름값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때렸다’는 상황을 통해 종교로부터 상처를 입은 경험을 비유적으로 풀어낸다. 이처럼 절대자에 대한 의존 시도가 좌절되자 성동혁 시인은 점차 절대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스스로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적극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트램펄린 위에서

높게

뛰다 보면

나의 자화상이 만져진다

자화상 밑엔

비둘기가 앉아 있다

 

예배당 밖엔

벽돌만 쌓아 두었는지

모두들 들었단 목소리를 듣지 못했네

 

자물쇠가 있는 것들은 열 수 있다는 희망

밀리지 않는 돌들

 

김이 나는 얼굴로

주일에만 풍선을 손목에 묶고

떠오르며 반짝이는 보석처럼

 

비둘기는 풍선을 쪼며

나를 트램펄린 위에

가두어 두었네

 

지혜로운 이슬과 트램펄린 위에서 튀어오를 때

기도는 그대로 있었네

눈을 감고 죄를 뛰어넘을 때마다

예배당이 자랐네

 

- 성동혁, 「거인의 잔디밭」

 

 

시 속에서 화자는 예배당의 한계를 인식한다. 예배당이 벽돌로 소리를 가로막기 때문에, 구원의 메시지가 모두에게 전달되지 못하는 것이 문제 상황이다. 이는 앞서 제시되었던 시 「동물원」과 같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이 해당 주제를 주의 깊게 다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화자는 예배당이 지니는 구원의 불평등성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진다. 그는 스스로 자물쇠를 풀어보려고 시도하지만, 쌓아둔 벽돌이 너무나도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기에 예배당의 문을 열지 못한다. 

 

그러나 화자는 포기하지 않고 트램펄린이라는 수단을 활용하여 예배당의 내부와 소통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시인은 트램펄린을 뛰는 행위를 죄를 뛰어넘는 행위라고 묘사한다. 이는 죄를 뛰어넘으려면 정지된 상태로 구원을 기다리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직접 구원에 가까워지도록 행동을 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한다. 사실 시에서는 트램펄린을 뛰는 행위보다 구원에 도달하는 손쉬운 행위로서 열기구를 타는 것이 제시된다. 그러나 비둘기는 화자가 열기구를 활용해 쉽게 구원을 얻는 것을 반대한다. 그렇기에 풍선을 쪼아버리고는 화자를 트램펄린에 가둔 것이다. 이를 통해 구원에 대한 화자의 능동성이 극대화되면서, 화자는 트램펄린을 뛰는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자화상을 보게 된다. 이는 화자가 자신의 진실된 자아와 조우했음을 상징하며, 결국 해당 시는 구원을 외부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노력해 구원을 찾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전달한다. 

 

이렇게 성동혁 시인의 시세계는 종교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겪다가 4부의 「종유석」에서 “떼쓸 곳이 없어 의젓해진다”라고 서술된다. 이는 의존적인 태도를 완전하게 탈피한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절대자에 의존하기를 거부하는 김혜순 시인은 타인과의 연대 속에서 죽음의 상황을 직면할 원동력을 얻는다. 그녀는 「죽음의 축지법」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젖가슴 저 고아에게나 줄 것을 /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두 눈동자 저 물고기에게나 줄 것을 / 이럴 줄 알았으면 이까짓 머리통 저 장미에게나 줄 것을’이라고 서술한다. 여기에서 고아, 물고기, 장미 등의 연약한 존재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고자 하는 시인의 배려의 태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녀가 타인과 연대하는 이유는 단지 배려의 의미만을 지니지는 않는다.

 

 

맘껏 날아가라

빛이 오면 빛에게 눈을 주어라

바람 오면 바람에게 귀를 주어라

(중략)

네 몸에 다른 이의 촛불이 켜지기 전에

 

- 김혜순, 「서울, 사자의 서」 (부분 인용) 

 

 

시인은 ‘네 몸에 다른 이의 촛불이 켜지기 전에’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듯 생명력이 다한 몸에 다시 생명력이 들어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시인은 시집의 후반부로 갈수록 죽음을 인정하고 삶에 매달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시인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것을 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해당 지점은 삶에 대한 의지를 다져서 죽음의 상황을 극복하려는 성동혁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 김혜순 시인은 이미 죽은 자와도 심적 연대를 구축한다는 특이점을 지닌다. 그녀는 「동명이인」에서는 세월호 사건, 「부검」에서는 민주화운동, 「자장가」에서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고인들의 감정에 동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연대는 시인이 죽음을 직시하려고 시도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Ⅲ 죽음의 경험 이후 무엇을 지향하는가


 

개인적인 죽음의 경험을 겪은 후, 각 시인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더 넓은 차원의 담론으로 확장시킨다. 성동혁 시인은 강한 혐오를 내비치던 붉은색, 다시 말해서 자신의 현실 영역에 대해 재인식하는 방향으로 논의를 확장시킨다.

 

 

붉다 라는 말이

소년의 나라에선

아름답다 라는

말로도 쓰인다

(중략)

크라스나야

붉다와 아름답다 중 무엇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지 몰랐다

 

- 성동혁, 「붉은 광장」 (부분 인용)

 

 

해당 시 「붉은 광장」은 시집의 후반부인 3부의 끝에서 두 번째 위치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가 시집에 등장하기 이전까지 시집에서는 붉음과 흰색에 대한 상징성이 지속적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앞선 논의들의 공통점은 흰색이 이상세계를 상징한다는 점, 그리고 붉은색이 현실세계이자 화자에게 고통을 주는 병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인이 붉은색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모습은 해당 시 「붉은 광장」에서 처음 등장한다. 화자는 소년의 나라에서 붉음이 아름다움과 유의어로 활용된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화자는 ‘나를 보는 소년의 눈이 그랬다 그리도 참혹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인가’라고 서술하며 소년의 말에 슬픔의 정서를 느낀다. 비록 소년의 나라와 화자의 나라가 동일하지는 않고, 더불어 화자의 나라에서는 붉음이 아름다움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화자는 붉음이 아름답게 인식되는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그는 소년들이 ‘굳건하고 청결하게 우뚝 서 있었다’고 표현해 그들의 바른 모습을 예찬하며, 그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묘사해 소년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이를 바탕으로 화자는 자신이 혐오했던 붉은색을 달리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의 종결부에서 ‘붉다와 아름답다 중 무엇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지 몰랐다’라고 서술하며 두 단어를 동일시 여기기 시작한다. 이는 화자가 자신의 병에 대한 자기 혐오의 정서를 일부분 극복했음을 보여준다. 시집의 진행에 따라 시인이 성장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김혜순 시인은 성동혁 시인보다 논의를 더욱 확장시킨다. 그녀는 죽음의 사회적인 면들까지 다루며 우리가 사회의 다양한 죽음들에 지녀야 할 추모의 자세를 언급한다. 아래의 시에는 그녀가 강조하는 추모와 책임의 행동 양상이 잘 드러난다.

 

 

간 다음에 가지 마 하지 마

온 다음에 오지 마 하지 마

 

떠날 땐 눈 감기고 손 모아주면서 가지 마 가지 마 울더니

문 열어 문 열어 했더니 오지 마 오지 마 하잖아

 

대나무에 종이 인형 붙여 오지 마 오지 마 하잖아

불길에 옷 집어넣고 오지 마 오지 마 하잖아

 

그래서 너는 발이 없잖아

날개도 없는데

 

그런데 날기만 하잖아

내려앉지도 못하는데

 

감추어도 다 보이잖아

뇌도 없는데 다 알잖아

 

너무 춥잖아

몸도 없는데

 

그리하여 오늘 아침 침대 밑에 숨은 네 잠옷이

혼자서 가늘게 흐느끼고 있잖아

 

관이 물을 받고 있잖아

관에서 너는 이미 떠났잖아

 

달 베개엔 네 머리 자국

구름 이불엔 네 몸뚱어리 자국

 

그러니 간 다음에 가지 마 하지 마

그러니 온 다음에 오지 마 하지 마

 

- 김혜순, 「간 다음에」

 

 

누군가 죽음을 맞이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더 이상 삶의 영역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한다. 시인은 이러한 우리의 모습을 ‘가지 마’라고 외치는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고인의 죽음을 부정하던 우리는 이내 죽음에 대한 슬픔이 무뎌진다. 그러고는 죽은 사람과 관련된 물건들을 집에 놓아두면 부정이 탄다는 이야기를 하며 그의 물건들을 정리한다. 옷을 태우거나, 죽은 사람의 영혼이 집에 남아 있지 않도록 종이 인형을 만드는 방식이 그 사례이다. 이는 우리의 추모가 얼마나 단편적이고 일시적인지를 보여준다. 죽음을 기리는 형식적인 절차들을 끝맺은 후 고인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우리의 역설적인 모습이 이 시의 시상으로 작용했다. 

 

시인은 사회에서 잊혀가는 고인들이 느낄 슬픔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어딘가에 내려앉아 머무르지 못하는 처지에 처해 있으며, 추위에 떨며 흐느낀다는 점을 제시해 그들의 아픔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시도한다. 더불어 우리가 죽음과 관련해 오해하고 있는 점을 정정한다. 살아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고인을 관에 묻었고, 그렇기에 고인은 관에 남겨진 채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인은 고인이 관으로부터 자유롭게 떠난 채 우리의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될 당위성을 부여한다. 죽음이 사회와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독자에게 ‘하지 마’라는 어투의 말을 건네어 죽은 사람들을 제대로 추모해야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동일 시집의 다른 시에서도 등장한다. 시 「포르말린 강가에서」에는 타인의 죽음을 바라만 봐야 하는 무기력한 존재로서 ‘시험관에 담긴 뇌’가 등장한다. 그 뇌는 죽은 자들에 깊이 공감하지만, 육신과 연결되어 있지는 못하기 때문에 어떠한 행동적인 도움도 주지 못하는 ‘방관자의 뇌’일 뿐이다. 그렇기에 시험관 속의 뇌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늘 머리를 벽에 짓찧으며 울고 싶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살아있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전달한다. 죽은 사람들에게 아무리 슬픔을 표해도 그들을 도울 능력은 없는, 다시 말해서 감정이 실천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계를 지닌 존재로서의 살아있는 자들이 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 「이렇게 아픈 환각」에서 ‘너는 들어라 무서워 말고 들어라’, ‘너는 보아라 무서워 말고 똑똑히 보아라’라고 제시하여 우리가 사회의 죽음들을 명확히 인식하고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제시한다. 그리고 위의 시 「간 다음에」에서 ‘온 다음에 오지 마 하지 마’라고 제시해 죽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포용할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Ⅳ 형식적 측면에서의 비교


 

두 시인이 궁극적으로 전달하는 바는 시집의 구성 방식을 통해 그 전달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죽음을 직면한 개인의 내면 상태를 상세하게 서술하고자 했던 성동혁 시인의 경우, 시집을 4부로 구성한 다음 부가 지날수록 변화하는 개인의 인식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이를 통해 그는 죽음에 대한 경험이 죽음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독자에게 제시해주었다. 

 

한편 김혜순 시인은 시집을 부로 나누지 않은 대신 49제 형식으로 구성했다. 그래서 그녀는 추모라는 키워드를 독자들에게 각인할 수 있었으며, 이는 김혜순 시인이 죽음을 사회적 논의로까지 확장하는 것을 뒷받침해주었다. 

 

결국 시집의 형식 차이는 각 시인이 죽음에 대한 어떤 성찰을 전달할 것인지를 명확히 드러냈다는 의의를 지닌다.

 

 

 

결론


 

성동혁 시인과 김혜순 시인은 모두 죽음과의 직면 앞에서 삶이 지니는 부조리한 면들을 되새긴다. 성동혁 시인은 자신이 타고난 병에 원망하는 마음을 가져, 자신과 같이 의지 밖의 원인으로 죽음을 조우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가진다. 이는 그의 시세계에서 도망치는 행위를 통해 대응이 시도된다. 그러나 시인은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짐으로써 자신의 두려움을 해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반면 김혜순 시인은 급작스럽게 죽음을 경험하는 시적 주체의 사례를 제시하여 논의의 폭을 평범한 사람들로까지 확장한다. 그녀는 죽은 사람들이 대우 받지 못하는 사회적 현상에 집중하며, 그 원인을 삶과 죽음의 분리에서 찾는다. 그렇기에 시인은 삶과 죽음이 지니는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죽음을 이해한다. 

 

이러한 인식 차이는 두 시인이 죽음의 상황을 직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성동혁 시인은 삶과 죽음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이상적 세계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을 표출한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자의 힘을 신뢰하지만, 점차 절대자가 지니는 무력함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주체로서의 존재의 중요성을 시에서 드러낸다. 

 

김혜순 시인은 죽음을 직면하는 힘을 절대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로부터 찾는다. 그녀는 살아있는 사람들과도 연대를 하지만, 동시에 죽은 사람들을 추모함으로써 이들과의 심적 거리감을 좁혀나간다. 그 결과 그녀는 죽음을 직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한다. 

 

이렇게 죽음에 가까워지는 경험은 두 주체의 사고관의 변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성동혁 시인은 본래 혐오감을 표출하던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적으로 재인식하는 과정을 거친다. 김혜순 시인은 논의 범위를 더욱 확장하여, 타인의 죽음을 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러한 각 시인의 다짐은 시집의 형식적 측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성동혁 시인은 부가 진행될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김혜순 시인은 49제에서 사람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나가며


 

파스칼은 자신의 저서 「팡세」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해 앞서 제시된 두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죽음에 대한 심층적인 사유를 펼쳐 나가게 된다. 이들이 전달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진실이, 우리 사회가 죽음에 대해 가진 막연한 불안함을 해소해주길 기대한다.

 

 

 

에디터 고은샘.jpg

 

 

[고은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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