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개인적이되, 개인적이지 않은 슬픔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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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에서 비롯된 슬픔은 무자비하다. 소중한 이가 떠나 버린 가슴의 빈 자리를 슬픔이 가득 채우면 숨조차 쉬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슬픔이 더욱 잔인한 이유는, 이 사회에서 슬픔의 과정이 지나치게 개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지만. 슬픔을 나누기란 쉽지 않다. 슬픔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슬픔을 빠르게 '떨쳐내는' 이는 격려를 받지만, 그러지 못한 이는 서서히 질타의 대상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전시한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개인적인 일로 공동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다.
사별로 인한 슬픔을 고찰한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슬퍼하는 과정도 병과 죽음처럼 수치스럽게 여긴다. 실패라고 여기는 것이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실패라고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슬픔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
"삶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런데 슬픔은 그 사소한 것들을 비틀어서 떼어내 버린다."
삶이 사소한 만큼 내 삶을 함께 이루고 있었던 사람과의 기억 모두 지나치게 사소해서, 일상의 어느 곳에서 그 조각이 튀어나와 나를 아프게 찌를지는 예상할 수가 없다. 마치 곳곳에 지뢰가 묻혀 있는 들판 위를 걸어가는 느낌일 것이다.
이 지뢰는 순식간에 없어질 수도,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젠가 무뎌지리라는 생각은 하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는 사람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이 때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은 이 지뢰밭 위에서 살아 나가는 과정 자체가 '불안정'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슬픔의 과정은 '개인적'이어서는 안 된다.
"연대를 꾀하는 성향의 저변에는 인간의 근원적인 진실이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 다른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을 상실함으로써 불안정해진 세계는 다시 사람을 통해 안정을 찾는다. 그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누군가 내 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이 안정감을 기반으로, 사람은 슬픔의 과정을 견뎌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슬픔에 잠식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다그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감정은 개인의 것이지만,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렵다. 그렇기에 슬픔의 과정이 '공유되는' 사회가 더욱 필요해진다.
상실의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타인에게서 안정감을 얻는 게 사람인 만큼,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살아가기는 쉽지 않고, 사람은 유한하다. 나에게도 찾아올 이 슬픔이 마냥 두렵기만 한 사회보다는, 언젠가 이 슬픔이 찾아오더라도 또 다른 존재에게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는 사회가 훨씬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슬픈 사람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사회에서 슬픔은 더 이상 죄악시되지 않는다. 그런 사회에서야 비로소, 슬픔은 나눌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유지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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